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

(813)
모디아노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며 2014년 노벨문학상은 프랑스의 소설가 파트리크 모디아노애게 돌아갔다. 작가 모디아노는 고등학교 시절 내 문학적 감성에 불을 댕겼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문학동네, 2010)의 작가이다. 오래전 프레시안북스에서 편집자의 책상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그때 모디아노에 대한 나의 추억을 고백한 적이 있다. 아래에 옮겨 적는다. 모디아노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그리고 헌책방에서 사들인 수많은 문예지가 있다. 그중 내가 가장 사랑한 책은, 기억이 맞다면, 프랑스 소설가 파트릭 모디아노의 콩쿠르 상 수상작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문학동네, 2010)가 실렸던 《문예중앙》이다. 소설가를 지망했던 나는 이 작품을 틈날 때마다 읽었다. 그리고 극도로 예민한 문체로 스치듯 기록된 인물들의 ..
종이의, 종이를 위한, 종이에 의한 애도와 비탄과 애처로움. 시의 한 종류인 엘레지의 특징들이다. 위키디피아에 따르면, 사자를 위한 송가(送歌)나 애가(哀歌)로 쓰인다.종이가 죽었단 말인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종이와 같은 불멸의 물체가 죽을 수 있단 말인가? 맙소사, 말도 안 돼! 종이가 죽었다면 당연히 무척이나 슬프겠지만, 이런 일은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다. 그런데 『페이퍼 엘레지』(홍한별 옮김, 반비, 2014)에서 영국의 작가 이언 샌섬은 ‘엘레지’라는 제목을 붙이고는 이미 사망 통지를 받아 버린 종이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기록해 나간다. 종이가 죽고 인간이 살아남았다면(정녕 그럴 수 있기만 하다면), 어둡고 우울한 제목이 붙은 이 책은 아마도 ‘살아남은 자의 변명’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제목의 어두움, 그러니까 애도..
도쿄대학 철학과 수업은 이렇게 대단한가 사회생활을 경험한 뒤 지적 욕구에 불타고 있던 터라 일주일에 한 번 또는 두 번 나가는 세미나 수업을 많이 신청했습니다. 그리스어로 플라톤을 읽고, 라틴어로 토마스 아퀴나스를 읽고, 프랑스어로 베르그송을 읽고, 독일어로 비트겐슈타인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학과 외 수업으로, 히브리어로 진행되는 구약성서 강독을 읽었습니다. 또한 한문 강독인 『장자 집주(莊子集註)』 강의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라비아어 수업, 페르시아어 수업도 들었습니다. 모두가 소수 학생만이 듣는 수업이어서 결석을 불가능하였습니다.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공부만 했던 셈입니다. 당시 철학과 수업에서 한 구절 한 구절 소홀함 없이 철저하게 읽어 나가던 수업 방식, 더욱이 교수님의 엄격한 지도 아래 땀을 흘리며 정독을 하던 시간은 매우 소중한 ..
쿤데라, 참을 수 없는 관능의 가벼움 끝없이, 끝없이 계속되는 투덜거림, 새로운 작품이 나올 때마다 반복되는 질문들. 네이버 지식iN 등에 넘쳐 나는 기이한, 정말 기이한 회귀들. 가령, 연어 떼처럼 쿤데라의 새로운 작품 앞으로 돌아왔다가 흩어질 때가 되면 어김없이 쏟아지는 말들, 말들, 말들.“밀란 쿤데라의 소설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몇 번을 다시 봐도 무슨 얘긴지, 주제라든가 말하려는 바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도대체 쿤데라 소설에서 말하는 게 무엇입니까?”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슬픈 내용인가요? 저는 소설이 너무 어려워서 잘 이해가 안 돼서 모르겠는데, 지인 중에 펑펑 울었다는 분도 있어서. 솔직히 저는 봐도 슬픈 건지 아닌지 모르겠네요.”쿤데라의 작품에는 분명히 읽기를 촉발하는 동시에 골치를 퍼뜨리는 힘이..
콘텐츠 기획자가 예술가가 되어야 하는 이유 지난 수요일 순천향대학교에서 두 번째 강의를 했다. 그날 이후 이런저런 일로 너무 바빠서 강의록을 정리하지 못했다. 내용을 요약하고 표현을 조금 손보아서 여기에 올려 둔다. 콘텐츠 시대가 열렸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다니는 학과에도 마침 콘텐츠라는 말이 들어가 ‘미디어콘텐츠 학과’입니다. 이 명칭은 시대의 첨단을 따르고 있지만, 국문과나 경제학과와는 달리 신생인 만큼 도대체 뭐 하는 거야 하는 질문에 쉽게 답하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제가 하는 이 강의의 이름도 ‘콘텐츠와 창조성’입니다. 이쯤 되면 ‘콘텐츠’의 마법을 아시겠죠. 민들레의 홀씨처럼 바람을 타고 이 말은 지금 곳곳으로 퍼지면서 영토를 넓혀 가는 중입니다. 그런데 콘텐츠란 무엇일까요? 흔히 어떤 문화 상품의 내용을 가리킬 때 쓰입니다. 책, 연극..
미국 작가협회가 아마존에 보낸 공개편지 어떤 판매자가 가격에 동의하지 않을 때, 아마존은 그 소비재를 소비자들에게 아예 노출하지 않을 수 도 있는 모든 권리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책이란 단지 소비재가 아니다. 책은 더 값싸게 쓰일 수 없고, 저자들은 다른 나라에서 아웃 소싱할 수 없다. 책은 토스터나 텔레비전이 아니다. 책 하나하나는 [같은 재료라도] 저자에 따라 [결과물이] 다르게 나타나는 독특한 창조물이다. 한 개인의 측면에서 볼 때, 책은 외롭고 치열하고 때때로 값비싼 투쟁을 치른 후에야 비로소 창조되며, 어떤 저자는 자신의 책이 독자들을 발견할 수 있느냐에 의존해서 생계를 꾸릴 수밖에 없다. 저자들을 독자들과 떼어놓기 위하여 자신이 보유한 어마어마한 권력을 행사할 때, 아마존이 저자들을 위협에 빠뜨리는 것이다. 미국 작가협회가 아마..
창문에 새기다(窓銘) /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 창문에 새기다 임성주 네 얼굴을 깨끗이 하고, 네 어깨를 가지런히 하라. 기력이 다했다고 말하지 말고, 생각을 어질게 하며 의로움을 돈독히 하며 정신을 가다듬어서 한 숨결조차도 게으르지 말라. 窓銘整爾顔, 竦爾肩. 莫曰旅力之愆, 仁思敦義思神, 靡懈一息之存. 사람이 거주하는 방은 사적인 공간이다. 바깥에서 남의 눈을 의식할 때는 곧잘 예의와 염치를 차리는 이라도 방문을 닫아걸고 홀로 있을 때에는 마음이 무너지고 자세가 흐트러져 제멋대로 되기 쉽다. 거대한 방죽도 개미구멍으로부터 붕괴하는 법이니, 구멍이 났을 때 작다고 해서 즉시 메우지 않고 버려두면 결국에는 감당 못 할 큰일로 번지고 만다.그래서 옛 사람은 홀로 있을 때조차 몸가짐을 조심하는 ‘신독(愼獨)’을 자기 수양의 첫걸음이자 궁극의 목표로 삼았다...
Magazine의 시대는 가고, Zine의 시대가 오다 오늘날 미디어는 말 그대로 격변 중이다. 책이든, 신문이든, 방송이든, 영화든, 음악이든, 과거의 관행을 좇아 미래를 상상해 내는 것은 도저히 가능하지 않다. 이렇듯 시간의 직선이 끊어져서 과거가 미래를 가리키지 못할 때의 현재 상태를 일컬어 ‘카오스’라고 한다. 지금 미디어 지형에서 카오스는 두 가지 사태로 나타난다. 모바일 혁명의 가속화에 따라 미디어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고 서로 결합과 해체를 반복함으로써, 기존의 생산/소비 규칙이 작동하지 않는 것. 출판에서는 서점, 신문에서는 지국, 방송에서는 송전탑, 영화에서는 멀티플렉스 영화관과 같은 망의 지배력이 나누어짐으로써 자연스레 형성된 콘텐츠 영토의 분할 지배와 상호 협력적 제휴 관행이 사라지고, 스마트 기기라는 단일 평면에서 소비자의 시간을 놓고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