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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망각의 이중주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 김중혁 지음/문학과지성사 김중혁의 세 번째 장편소설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문학과지성사, 2014)는 최근 한국 소설에서 기이한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테마인 기억과 망각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프라이버시의 자발적 유포에 의해 지탱되는 포스트 프라이버시 사회를 향해 무반성적으로 달려들고 있는 한국 사회의 광적 열풍이 작가들의 예민한 무의식을 위협하기 때문일 것이다.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문학동네, 2013)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 역시 범죄소설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범죄의 극적인 해결보다는 포스트프라이버시 사회의 기억과 망각이라는 사회철학적 문제를 사유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탐정물 특유의 지적 재미와 말초적 자극이 약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권력의 말과 문학의 말 말의 정의 - 오에 겐자부로 지음, 송태욱 옮김/뮤진트리 오에 겐자부로의 『말의 정의』(송태욱 옮김, 뮤진트리, 2014)는 오키나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그리고 후쿠시마를 문학적 에세이의 형태로 사유한다. 이 세 장소는 “인간의 교만 위에서 성립한 지금의 삶”의 뿌리와 귀결을 드러내는 중요한 공간적 상징이다. 태평양 전쟁 말, 오키나와에서는 강요된 자결이 있었다. 기울어져 가는 전세 속에서 일본군은 도카시키지마 섬 주민에게 ‘집단 자결’을 강요하고, 군대가 건넨 수류탄으로 300명 이상이 자결하고 그러지 못했던 주민들은 한낱 어린아이까지도 가족이 도끼나 낫, 또는 손으로 죽인 사건이 있었다.(오에는 이 사건을 고발해 쓴 『오키나와 노트』 때문에 소송을 당했고, 결국 무혐의로 승소했는데 이 책에서는 그..
후한서를 번역해 책으로 내다 오래전부터 조금씩 번역해 왔던 『후한서』(새물결, 2014)가 드디어 책으로 나왔다. 본기만 번역해 출판했지만 국내 초역이라는 점에서 자부심을 느낀다. 역사 전공자도 아니고 한문 실력도 딸리는 아마추어의 작업이 책으로 나오게 된 것은 전적으로 조형준 선배의 호의 덕분이다. 늘 남의 책만 만들다가 내 책이 편집의 대상이 되고 책으로까지 출판된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라서 작업 중에 계속 마음이 설레었다. 그저께 처음으로 책을 받고, 가벼운 출판 기념 술자리를 가졌다. 어제 늦게 집에 와서 내내 잠들지 못했다. 망오십을 앞두고 책을 한 권 펴내게 된 것이 나로서는 더더욱 뜻 깊다. 삶의 새로운 단계를 조심스럽게 열어 둔 느낌이다. 아래에 이 일과 관련해 두 가지만 먼저 밝혀 두고 싶다. 책이 출간된 후 가장..
생산과 소비의 새로운 윤리를 찾다 낭비 사회를 넘어서 - 세르주 라투슈 지음, 정기헌 옮김/민음사 세르주 라투슈의 『낭비 사회를 넘어서』(정기헌 옮김, 민음사, 2014)는 ‘계획적 진부화’라는, 경영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익히 알려졌으나 일반인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품 생산과 소비 양식을 다룬다. 계획적 진부화는 소비를 촉진하고 생산을 지속하기 위해 제품에 인위적으로 수명을 부여하여 강제로 폐기를 유발하고 재구매를 유도하는 것을 말한다. 처음에는 자동차, 스타킹, 면도날, 전구 등 공산품에 적용된 이 개념은 일회용품의 출현에 따라 상품 전반으로 퍼져 나갔고, 유통기한 개념이 도입되면서 농산물로 확대되었다. 더 나아가 연봉 계약직, 비정규직 노동자 등 인간 자체를 일시적으로 고용하고 폐기하는 인간적 진부화에까지 이르게 되었다.현재 우..
박진영의 『책의 탄생과 이야기의 운명』(소명출판, 2013)을 읽다 책의 탄생과 이야기의 운명 박진영 지음/소명출판 오랫동안 블로그에 글을 쓰지 못했다. 글은 대개 번민의 산물이지만 또 여가의 결과이기도 해서, 시절이 작은 겨를조차 앗아 갈 때에는 이곳은 좀처럼 채워지지 못하고 텅 비게 된다. 그사이 이런저런 글도 몇 편 쓰고, 책도 십여 권 읽었지만 마음이 전혀 따르지 못해서 여기에 옮겨 두지 못했다. 입시를 앞둔 아이들 탓에 여행을 떠나기 힘든 긴 연휴를 틈타 서재를 정리한 후에야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꾸준한 마음이 계속될지 모르나, 일단 내키는 대로 계속 적어 볼 요량이다. 근대 자본주의와 책의 불멸성과 편집자의 운명에 대해 고민하는 이라면, 박진영의 『책의 탄생과 이야기의 운명』(소명출판, 2013)을 한 번쯤은 읽어야 할 것이다. 대한제국의 소멸과 일제강점..
아디오스, 마르케스! 오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세상을 떠났다. 여든일곱 살이다.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어 버린 자서전의 제목처럼 마르케스는 전 세계의 독자들을 매혹시킨 뛰어난 이야기꾼으로서 평생을 살았다. 독재와 가난으로 얼룩진 남미의 현대사를 배경으로 고통받는 민중들의 삶을 특유의 환상적 상상력으로 승화한 그의 작품들은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새로운 문학의 영토를 이룩했다. 그리고 그의 영지는 수많은 후배 작가들과 독자들이 문학을 순례할 때 반드시 들러야 하는 필수 코스가 되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Garcia Marquez(1927년 3월 6일~2014년 4월 17일) 마르케스의 타계 소식을 듣고 곧바로 『백년의 고독』(조구호 옮김, 민음사, 2000)을 다시 꺼..
모험과 긍정의 인간, 돈키호테(한겨레 기고) 《한겨레》 출판면에 ‘편집자가 고른 스테디셀러’라는 코너가 있다. 이곳에 글을 맡아서 세 번 쓰게 되었다. 첫 번째로 고른 책은 최근에 다시 완독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박철 옮김, 시공사, 2004)였다. 아래에 옮겨 둔다. 지난해 5월, 편집자로 일한 지 스무 해째 된 것을 기념해 아내와 함께 스페인을 여행했다. 지중해의 뜨거운 태양이 세속의 번뇌를 증발시키고, 늦도록 들지 않는 밤과 온화한 바람이 산책을 한없이 부추기는 가운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같은 질문에서 ‘편집이란 무엇인가’ 같은 질문까지 온갖 의문을 떠오르는 대로 풀어 놓고 마음껏 생각을 즐겼다.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라는 말로 정리했는데, 내 인생은 어떤 말로 요약할 수 있을까. 그러다 한..
『이중톈, 사람을 말하다』(중앙북스)를 완독하다 아침과 점심, 딸아이를 미술학원에 데려갔다 데려온 시간을 제외하면 새벽부터 일어나 하루 종일 책을 읽었다. 이덕무의 말처럼, 새벽에 『논어』를 읽는 일은 하루를 온화하게 한다. 번역서의 교정지를 받아 편집자가 읽고 표시한 부분을 중심으로 읽어 가면서, 머리가 한껏 복잡해질 때마다 잠시 눈을 붙이거나 이중톈의 『이중톈, 사람을 말하다』(심규호 옮김, 중앙북스, 2013), 프랑수아 줄리앵의 『무미예찬』(최애리 옮김, 산책자, 2010), 김탁환의 『혁명――광활한 인간 정도전』(전2권, 민음사, 2014), 박형서의 『자정의 픽션』(문학과지성사, 2006)을 조금씩 들추었다.오늘 한 챕터 남았던 『이중톈, 사람을 말하다』를 완독했다. 이 책의 원제는 ‘중국의 지혜(中國的智慧)’인데, 몇 년 전 베이징 도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