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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職)/책, 공동체를 꿈꾸다

[오래된 독서공동체를 찾아서] <7> 공무원들 7년째 독서모임 "시민 목소리에 더 공감하게 됐어요"(김해 행복한 책읽기)


'책읽는 도시' 선포 계기로 첫 모임

인사고과 혜택 없어도 자발적 참여

직급 다양하지만 독서토론 땐 평등

"살아갈 힘도 얻고 업무에도 도움"


“이 책 표지를 볼 때마다 상당히 불편했어요. 지난달 말에 사무실에서 개인적으로 상당히 힘든 일이 있었습니다. 한 남성 직원이 의자를 밀치는 등 저한테 폭력을 행사했는데도, 조직이 워낙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다 보니 저에 대한 배려 없이 그까짓 일은 아무 일 아니라는 식으로 지나치려고 했습니다. 그 일을 겪으면서 저 개인적으로, 또 우리 조직에 대해 모멸감을 엄청나게 느꼈습니다.”

소리가 조금씩 잦아들더니 결국 눈물이 쏟아져 내린다. 오늘의 ‘행복한 책’은 김찬호의 『모멸감』(문학과지성사)이다. 감정은 개인의 것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되며, 특히 한국사회는 모멸을 서로 주고받는 가혹함 속에서 인간적 자존의 세계를 몰락시키고 있다고 통렬히 성찰한 책이다. 좋은 책은 사람을 슬프게 한다. 감정의 바닥을 긁는 불편을 이룩하고, 인식의 지평을 찢는 고통을 불러온다. 운명처럼 우리를 건드려 삶의 비밀을, 존재의 심연을 연다. 그리고 그 침잠의 어둠으로부터 수직으로 생명을 분출한다. 조금 후 그녀가 다시 입을 연다.

“이 책은 저의 손상된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박수소리가 유난히 우렁차다. 오늘도 ‘행복한 책’이 또 하나 김해시청에 생겨난 것이다. 읽기는 현실이라는 절망의 지옥에 자기인식의 씨앗을 심고, 그로부터 살아갈 힘의 도래라는 거대한 기적을 생성한다. ‘모멸’은 모든 곳에 있다. 그녀에게 폭력을 행사한 이 역시 ‘모멸’이라는 사회적, 문화적 바이러스의 숙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모멸을 복제하는 중이리라. 그러나 자기인식 없는 구원은 있을 수 없고, 자기발견 없는 희망도 있을 수 없다. 책이 행복의 열쇠가 된다면, 이는 “막연히 찾아 헤매면서도” 좀처럼 보지 못하는 “자기 운명이 이미 자기를 둘러싸고 있음을”(헤르만 헤세) 알려주기 때문이다. 만연한 모멸의 이유와 근거를 안다면, 이미 이에 대한 해결의 첫걸음 역시 뗀 셈이다.


‘책 읽는 도시’ 김해시청, “공무원부터 읽자”

책읽기는 반드시 공부를 동반하지 않지만, 공부는 반드시 책읽기를 수반한다. 수많은 정치적,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입법, 사법, 행정 등 공공영역은 여러 현안에 대한 깊은 연구와 학습을 필요로 한다. 공무를 담당하는 이들이 책을 읽고 시민사회의 삶에 깊은 관심을 품지 않는 나라는 결국 뿌리까지 혁신되지 않는다. 매년 수백 조 예산을 운영하면서도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인 것은 ‘자원(돈)’의 결핍 탓이 아니라 전적으로 ‘읽기’의 결핍 탓이다.

김해시에 있는 ‘행복한 책읽기’는 소중하다. 우리나라에 흔치 않은 ‘오래된 공무원 독서모임’이기 때문이다. 2008년 김해시가 ‘책 읽는 도시’를 선포한 것을 계기로 처음 모였으니 벌써 일곱 해째나 계속되었다. 모임을 처음 발의한 조강숙 씨가 말한다.

“사업을 진행하려고 도서관 정책모임이 자주 열렸는데, 문득 시민들한테만 책을 읽으라 하지 말고 우리도 책 읽는 모임을 하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반응이 예상 밖으로 뜨거웠습니다. 금세 열 명 정도 모였습니다. 처음 같이 읽은 책은 시에라리온의 소년병 이야기를 다룬 『집으로 가는 길』(북스코프)이었습니다.”

공무원 독서모임을 위협하는 것은 물론 잦은 인사이동과 불규칙한 업무시간 등이다. 하지만 독서를 촉진하려고 인사고과에서 가점을 주는 당근이 문제인 경우가 더 많다. 점수를 부여할 때엔 모임이 활발하다 정책이 바뀌면 모임이 급속히 쪼그라든다. ‘행복한 책읽기’는 처음부터 책 읽는 직원한테 인사고과 혜택을 주는 것에 찬성하지 않았다. 읽지 말라 해도 좋아서 읽을 텐데, 반드시 점수를 따려고 독서 기록 등을 제출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하기야 좋아서 하는 일이라면 보물을 하늘에 쌓으면 아주 족할 것이다. 미술도 하고 시도 쓴다는 팔방미인 김미경 씨가 말한다.

“조건이 따로 붙지 않는 자발적 독서가 중요합니다. 고과를 높이려고 억지로 읽는 책은 삶에도 도움 되지 않고, 결국 읽기에 대한 혐오를 부추길 뿐입니다. 읽지 말라고 해도 기꺼이 읽으려 했던 순진한 마음이 있었기에 오랫동안 모임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직급과는 상관없이 자유롭게 토론

모임은 ‘행복한 책읽기’라는 정식 명칭보다는 ‘매둘목’이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하다. 매달 둘째 주 목요일에 시청에 모이기에 붙은 별칭이다. 회원은 젊은 직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그사이에 스물을 훌쩍 넘었다. 직급과 직렬이 아주 다양하지만 ‘매둘목’에서만큼은 당연히 평등하다. 지금까지 주로 화제작을 중심으로 시, 소설, 어린이책, 에세이, 인문서, 경제경영서 등 편식 없이 골고루 80여 권을 읽었다. 요즘에는 책 이야기를 끝내고 좋은 영화를 감상하기도 한다. 황숙자 씨가 이야기를 잇는다.

“발제자가 10분 정도 책 내용과 저자에 대해 발표하고, 전 회원이 돌아가면서 각자의 느낌이나 감동을 이야기하면서 좋았던 문장 등을 읽습니다. 자유롭게 이야기하되 생각이 다르다고 반박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책 내용에 비추어 직장이나 일상의 고민을 털어놓을 때는 선배들이 멘토가 되기도 합니다.”

반박당하지 않고 아무 말이나 할 자유는 직장 내 독서모임에서는 정말 중요하다. 봉건적 신분의식이 채 가시지 않는 한국사회에서는 토론에 열이 붙으면 흔히 계급장이 살아나기 십상이다. 모임 안에서 한 사람 독자로서 평등을 실현하고 발언을 공정하게 배분하는 정의를 이루는 것은 서로 마음이 통하는 만남을 오래 유지하려면 가장 애써야 할 바다. 특히 공무원 조직 같은 직급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윤선영 씨가 말을 잇는다.

“모임을 준비하려고 퇴근해서 책을 읽으니까, 아이들이 ‘밤마다 박사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매둘목에서 읽는 책들은 연말에 회원들이 고르고 사서들이 세밀한 검증을 거친 책들입니다. 덕분에 평소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뜻밖의 좋은 책을 만나곤 합니다. 읽고 나면 어떤 책이라도 한 줄은 남습니다. 또 모임에 나와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듣다 보면 소홀히 지나쳤던 것들이 되살아나서 내 삶으로 들어오기도 합니다.”


“책을 읽기 시작하며 살아갈 힘 얻어”

같이 읽기는 책을 여러 번 읽는 것이면서, 동시에 여러 번 인생 상담을 주고받는 것이다. 책이 열어준 입술에는 각자 살아온 삶의 무늬와 무게가 담겨 있어 마음의 두께를 더해 준다. 황무지처럼 드러난 마음은 삶에서 불어 닥치는 가벼운 산들바람에도 상처 입고 피 흘리지만, 초목이 굳게 덮인 마음은 거센 바람이 불어와도 먼지조차 날리지 않는다. 책읽기가 마음의 밭에 지혜의 씨를 뿌리는 일이라면, 같이 읽기는 오래 묵은 거름을 붓는 일이다. 김기혜 씨가 말한다.

“매둘목에 나와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몰라도 아들이 가출해 버렸습니다. 정말 당황했죠. 어찌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김해 ‘기적의 도서관’에서 부모 교육 특강이 있었던 것을 계기로 제 삶을 돌아보았고 책을 읽으면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매둘목에도 꾸준히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세 해 정도 저 자신을 돌아보면서 비로소 아이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모임에 나오는 이유도, 얻어가는 힘도 다르다. 업무상 자주 얼굴을 보는 사이지만, 그 마음결에 감춘 세세함까지는 알 수가 없다. 모임을 한 달씩 더하면서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고, 그 안에서 공감 주머니를 부풀리고 세심한 배려를 익히면서 삶이 숙성해 간다. 나이 든 사람은 귀가 열리면서 이른바 ‘꼰대’가 될 가능성이 사라지고, 젊은 사람은 대국적 시야가 열리면서 편협이 축소되고 생각이 넉넉해진다. 박근미 씨가 말을 보탠다.

“책모임에 나온 후 유연해졌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민원을 처리할 때에도, 그 일을 다양하고 풍부하게 생각하려고 애씁니다. 단순히 업무를 처리한다는 기분보다 그 일의 시민적 가치를 이모저모 따져봅니다. 공무는 저절로 생긴 게 아니라 시민의 삶과 밀접하게 이어져 있으니까요. 그렇지 않다면 저희가 존재할 필요가 없겠죠.”

시민사회가 먼저 존재하고, 국가는 나중에 기입된 것이다. 제도의 기계적 운영보다 시민적 삶이 우선임을 떠올릴 수 있어야, 시대변화 등의 이유로 이미 반시민적이 되어 버린 제도 역시 바꿀 수 있으며, 작은 예산이라도 시민적 삶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더 북돋우는 데 운용할 수 있다. 김미경 씨가 말한다.

“모여서 좋아하는 일을 했을 뿐인데, 어느새 저희 주변이 달라졌습니다. 그 변화에는 방향이 있는데, 저희는 확실히 넉넉해지고 대범해지고 깊이 있어졌습니다.”


시민들 이해하고 이어지는 통로

책은 인생의 바다에 던져진 백금과 같다. 정체된 내면의 변화를 일으키고 새로운 세계를 향한 운동을 촉진한다. 때로는 조용하고, 때로는 분명하게 책을 우리 자신을, 우리를 둘러싼 조직을, 조직을 둘러싼 사회를 변화시킨다. 돌아오는 마음속으로 백쌍미 씨의 말이 따라붙어 울림을 낸다.

“매둘목에 나와서 책을 읽으면서 시민들 목소리에 더 공감하게 되었고, 지역의 시민활동가들과 협업하는 일이 즐거워졌습니다. 저희 회원들이 시민인문학교를 기획하거나 어린이기자단과 함께할 때, 지역의 숨은 독립 운동가를 발굴하는 일을 할 때, 또는 자원봉사 조직을 운영할 때 저희가 읽고 이야기한 책이 저희를 이끌어갑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을 빌리면, 책은 플랫폼입니다. 책을 통해 인간은 세상의 모든 것과 이어집니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가 나아갈 길을 알려줍니다.”




“행복한 책읽기” 회원들이 시민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


김찬호 교수의 『모멸감』(문학과지성사, 2014)을 시민들과 같이 읽고 싶다. 서로 모멸을 주고받지 않고 모두가 자존하는 사회를 고민하는 이들한테 도움이 되는 책이다. 책 속에 나오듯, 우리나라 사람들은 ‘잘 산다’는 말을 흔히 ‘부유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잘 산다’는 것이 단지 물질적으로 무엇을 더 많이 가진다는 뜻이 아니라,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았는지로 기억될 수 있도록 시민들과 함께 노력하고 싶다.


김찬호, 『모멸감』(문학과지성사, 2014).

강준만, 『지방은 식민지다』(개마고원, 2008).

와타나베 이타루,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정문주 옮김, 더숲, 2014).

이만교, 『나를 바꾸는 글쓰기 공작소』(그린비, 2009).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휴머니스트, 2003).

정민, 『미쳐야 미친다』(푸른역사, 2004).

M. 스카펫, 『아직도 가야 할 길』(최미양 옮김, 율리시즈, 2011).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강승영 옮김, 은행나무, 2011).

주제 사라마구, 『눈먼 자들의 도시』(정영목 옮김, 해냄, 2002).

위화,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김태성 옮김, 문학동네,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