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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는 인류 종말에 반대합니다 아침에 사무실에 나와서, 『SF는 인류 종말에 반대합니다』(지상의책, 2019)를 읽었다. SF 작가 김보영과 SF 평론가 박상준이 함께 쓴 이 책은 ‘질문의 책’이다. ‘로봇이 감정을 가질 수 있을까, 로봇이 인격을 가질 수 있을까, 로봇에 사람 인격을 넣으면 그 로봇은 그 사람일까 아니면 그 사람을 흉내 내는 로봇일까, 클론에게 내 기억을 이식하면 이 클론은 같은 ‘나’일까, 만약 로봇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다면 그 로봇을 살아 있는 것일까, 꿈을 조작할 수 있는 기계가 있어서 꿈속에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어떨까’ 같은 흥미로운 질문들이 연쇄적으로 이어진다. 인공지능에 대한 실감을 전 인류가 느끼게 된 오늘날, 이 질문들은 누구나 한 번쯤 궁금하게 떠올리게 된 것이요, 일찍부터 영민한..
강의와 강연 봄에는 얼어붙은 입들도 풀리는 것일까. 사나흘에 한 번쯤 도서관 등에서 강연 요청을 받는다. '말하기'와 '듣기' 시즌이 바야흐로 시작된 것이다. 고정으로 하는 일이 있기에 강연을 많이 할 수는 없지만, 강연을 하러 다니다 보면 당황스러운 일이 하나 있다. 이 강연에서 만났던 청중을 저 강연에서 보는 일이다. 강연은 일종의 리듬을 타는데, 비슷한 주제를 이야기하다 보면 분명히 겹치는 부분이 생긴다. 관련한 일화 정도라면 괜찮겠지만, 때때로 분위기 환기에 필요한 농담마저도 같을 수 있다. 한데 강연을 한 차례 들었던 사람이 눈에 띄면,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야 할까 싶어 시작부터 말이 꼬이는 것이다. 강의와 강연은 다르다. 일반적으로 강의가 똑같은 사람을 대상으로 특정 분야의 지식이나 학문의 방법을 일정 기..
[내 인생의 노래] 조앤 바에즈의 「솔밭 사이로 흐르는 강물(the river in the pines)」 인생에서 내 돈으로 첫 번째로 산 기계는 오디오였다. 인켈 캐논. 가격은 두 달치 과외비인 40만 원쯤이었던 것 같다. 앰프, 턴테이블, 테이프 플레이어, 라디오, 스피커 등이 각각 분리되는 기계였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친구한테 선물로 받은 LP 레코드 앨범 때문이었다. 조앤 바에즈의 「솔밭 사이로 흐르는 강물(the river in the pines)」. 나의 상처이자 추억이자 자부심. 턴테이블에 올려 수천 번 들었지만, 이 앨범은 지금도 애지중지 가지고 있다. 선물한 친구가 자꾸 들었느냐고 묻는데, 턴테이블이 없어 들을 수 없었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몇 번을 얼버무렸지만, 어느 순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열 달 할부로 기계를 들여 조립한 후, 처음 소리가 집안을 울렸을 때의 감동은……...
독서공동체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 같이 읽고 함께 사는 삶을 찾아서 독자를 만나고 싶다 독자들을 실감하고 싶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였다. 편집자들은 솔직히 말하면 독자를 잘 모른다. 편집자로 일한 시간이 오래될수록 이 격절, 독자로부터의 소외는 심해진다. 때때로 저자 강연회, 사인회, 애독자 모임 등에서 독자를 만나기도 하지만, 관계자 입장이니 선뜻 속마음을 듣기가 어렵다. 독자들은 늘 저 너머에 있다. 책은 분명히 독자들한테 가 닿지만, 독자들은 항상 모니터 건너편이나 판매부수 이면에 흔적으로 존재한다. 편집자는 스스로 자기 분야 책들의 독자가 됨으로써 소외를 극복하려 애쓰지만, 어느 순간 가상과 실재 사이의 격차가 섬뜩할 정도로 벌어지곤 한다. 자신이 읽고 싶은 책과 독자가 읽으려는 책이 천만리 멀어지는 것이다. 나가던 책이 안 나가고, 팔리던 책들이 줄어든다. 초판 ..
사랑과 정욕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로올리이타.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 리, 타.” 나보코프의 『롤리타』(문학동네)의 첫 구절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소설의 첫 문장을 꼽으면, 분명히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것이다. 몇 번을 읽어도 울림이 멈추지 않고,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떨림이 지지 않는다.사랑을 하면 인간의 신체는 예민해진다. 비로소 온몸을 어떻게 써야 할지 알게 된다. 혀끝의 미세한 움직임조차 이처럼 선명히 떠올릴 수 있다. 사랑은 우리 신체를 낯설게 만든다. 사랑에 빠지면 몸은 평소와 다르게 움직인다. 사랑이 찾아오는 순간, 등뼈는 곧추 서고, 피부는 일어서며, 핏방울들은 들끓어 오르지 않는가. 그래서 사..
100세 인생 시대의 노후 전략 요즈음, 아내와 앞날을 이야기하는 일이 부쩍 늘었다. 세상의 앞일이나 우주의 미래 같은 거창한 이야기는 아니고, 주로 ‘100세 인생’을 살아갈 둘의 앞날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들이다. 때때로 미세먼지로 숨 막혀 죽지 않기를, 때때로 전쟁광들에 맞서 평화를 간절히 바라기도 한다. 하지만 인생 절반을 갓 넘긴 입장에서 정신적, 신체적으로 건강히 살고 평안히 스러지려면, 노후 경제문제 등 사적으로 건사할 일도 한둘은 아니다.수명과 관련해 인간은 완전히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다. 공중보건의 지속적 확산과 의학의 비약적 발달로 기대여명이 실제로 100세가 될 가망성이 높다. 심지어 어떤 학자는 100세를 최소수명으로 생각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사람들 대부분이 한 세기를 살아가는 사회를 인류는 경험..
평론가 3인이 말하는 ‘좋은 에세이란 무엇인가’ 장은수·오길영·권성우,‘황해문화’서 진단지난해 교보문고 종합 베스트셀러 50위 중 26종이 에세이였다. ‘에세이 열풍’이라 할 만하다. 주로 좌절감에 휩싸인 사람들을 겨냥한 ‘힐링 에세이’가 주류이다. 어떻게 보아야 할까. 계간 ‘황해문화’ 봄호는 ‘문화비평-에세이와 지성’ 특집을 기획했다. 출판평론가 장은수 이성과감성 콘텐츠연구소 대표와 문학평론가 오길영 충남대 교수, 권성우 숙명여대 교수가 근래 에세이 열풍을 진단하고, ‘좋은 에세이란 어떤 것일까’에 관한 단상을 밝힌다. 3인 모두 고립 혹은 고독을 견뎌내고 나오는 지성과 사유의 힘을 강조한다. 장 대표는 ‘에세이 열풍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글에서 “수많은 책이 ‘행복한 이기주의자’를 외친다”며 현재 한국사회의 증후를 읽어낸다. 대개의 베스트셀러..
출판과 종교(필사에서 종교로, 금속활자에 대하여) 고려는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어 낼 만큼 오랜 출판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중세 유럽 수도사의 일과가 성경을 베껴 쓰는 일과 기도로 이루어졌듯이, 고려의 승려도 경전을 직접 베껴 쓰며 사경을 제작했다. 필사의 전통에서 인쇄로의 전환은 세계사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또 하나의 혁명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쇄 문화는 수도원과 사찰, 성경과 경전이라는 신앙 공간, 종교의 성전(聖典)을 매개로 꽃피었다. 대장경에는 불교의 성전이라는 신앙적 의미로서뿐 아니라 지식을 체계화하고 소통하고자 했던 인류의 지혜가 담겨 있다. 대장경판이 봉안된 해인사 장경판전은 진리를 향해 나아간 당대의 노력을 보여주는 거대한 도서관과 같다. (중략)필사의 방식에서 목판 인쇄로의 발전은 인류의 역사에서 결정적 장면 중 하나이다.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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