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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책 읽기

쓰기는 언제나 읽기에서 시작한다

글쓰기 전성시대다. 이처럼 많은 이가 온갖 곳에 다양한 글을 쏟아내는 시대는 역사상 없었다. 그러나 정작 좋은 글을 쓰는 일은 쉽지 않은 듯하다. 글쓰기 강좌는 호황을 누리고, 관련 책의 판매 부수도 늘지만, 사람들은 자꾸 묻는다. ‘어떻게 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요?’ 좋은 글을 쓰려면 단순한 요령을 넘어서는 더 큰 배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글쓰기 사다리의 세 칸』(신혜경 옮김, 밤의책, 2022)에서 프랑스 페미니스트 철학자 엘렌 식수는 글쓰기가 H를 닮았다고 말한다.

H는 “글이 오르내리는 사다리”를 말한다. 왼쪽 기둥(I)이 한 언어이고, 오른쪽 기둥(I)은 다른 언어이며, 둘을 이어주는 선이 있다. “글쓰기는 두 해안을 잇는 통로를 만든다.” 글쓰기는 널리 알려진 것과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 범속한 일상과 진실의 순간을 하나로 연결해서 아름다운 화음을 이룩한다.

이 책은 1990년 식수가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의 웰렉 도서관 비판이론 강연을 정리한 것이다. 저자는 프란츠 카프카, 마리나 츠베타예바, 잉에보르크 바흐만, 장 주네 등의 작품을 통해 글쓰기를 말한다. 이들은 글쓰기 사다리를 내려가는 데 주로 사용한다.

작가는 ‘내려가는 자’다. 고통을 견디면서 “가장 낮은 것들과 가장 깊은 것들을 찾아가는 탐험가”이다. 오르페우스처럼 저승으로 내려가 거의 죽어 있는 생명을 해방하고, 현실의 지층 아래에 있는 진실을 파내려고 애쓴다. 작가가 “아래로 올라가려” 할 때, 사다리 H는 도끼 H(Hache)가 된다. 카프카의 말처럼,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 말이다.

도끼질은 저절로 주어지지 않고, 파헤치는 일에는 오랜 수습 기간이 필요하다. 서두르면 제자리에서 멈춘다. 식수에 따르면, 작가들은 모두 수습 기간에 세 학교에 다녔다. 망자의 학교, 꿈의 학교, 뿌리의 학교다.

망자의 학교는 선배의 책을 읽는 일이다. 대개 죽은 자들이다. 우리는 읽어서 이들의 상속자가 됨으로써 다른 세계로 ‘내려가는’ 길을 안내받는다. 누구나 읽기를 통해서 쓰기를 빚어낸다. 선배들이 파놓은 광산에서 진실의 광석을 캐내어 정련하면서 자신의 보석을 만들어 간다. 읽기가 쓰기다. 좋은 글을 쓰고 싶을 때 우리가 먼저 익혀야 하는 기술은 채굴이다.

망자들은 우리를 꿈의 학교로 안내한다. 꿈은 몽상과 상상의 학교다. 좋은 글은 꿈속에서 쓰이거나 꿈의 질서에 따라 쓰였다. 꿈속에는 우리 언어는 자유로워진다.

꿈의 바다에는 우리 욕망을 은유하는 신비의 수초가 자라고, 영혼의 낯선 얼굴이 떠다니며, 비밀스러운 진실이 섬광처럼 번뜩인다. 섣불리 자신을 한계짓는 대신 “랭보처럼 바람 구두를 신고 즐겁게 걸으면” 그 안에서 끔찍하고 두렵지만 아름다운 것을 만난다. 카프카는 말한다. “그 추악함 속에서도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뿌리의 학교는 생명의 학교다. 그런데 식수에 따르면, 뿌리는 기존 질서에서 추방되고 배제된 자의 땅, 불결하고 불순하게 여겨지는 장소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출산과 쾌락처럼 금지된 대지다. 좋은 글은 한 사회의 금기를 기꺼이 넘어선다는 뜻이다. 히브리의 신이 낮은 데로 임하듯, 창의적 글쓰기는 낮은 곳에 뿌리 두기를 멈추지 않는다. 언어의 새로운 영토는 이곳에서 탄생한다.

글쓰기 사다리는 낮은 곳을 향하는 ‘읽기, 상상하기, 위반하기’의 여정을 반복하면서 진실의 언어를 발굴하는 무한한 과정이다. 글은 넘쳐나지만 좋은 글은 드문 시대다. 쓰기는 언제나 읽기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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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칼럼입니다

 

 

엘렌 식수, 『글쓰기 사다리의 세 칸』, 신혜경 옮김(밤의책,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