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편집부 직원들은 필자 관리와 책 제작에만 관여합니다. 책 교정은 특정 학문을 전공한 비상근 아르바이트에게 철저하게 책임을 맡겨서 상근자의 인건비를 아끼고 있습니다. 이런 구조이기 때문에 필자의 책임을 강화시키는 동시에 전공자의 꼼꼼한 검토를 받아 더 확실하게 출판할 수 있지요.”
일본 호세대학 출판국 기획부장의 말이다. 2002년 황해문화에 실린 김응교 선생님의 「일본 대학 학술서적의 인프라」에 나와 있다. 오래전 글이지만 깊이 음미할 만한 데가 있다.
알다시피 호세대 출판부는 일본을 대표하는 학술 출판사로 우니베르시타트 총서로 유명하다. 해외 사상에 관심 있고 일본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 중 이 총서에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드물다.
2010년까지는 한 해 70권 정도 책을 11명의 편집자가 진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상급 난도의 학술서적을 한 해 예닐곱 권 진행하는 셈이다. 자칫 한 책에 몇 달씩 걸릴 수 있으니,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편집과 교정을 분리하는 위와 같은 시스템을 갖춘 것이다.
이런 방식의 시스템이 유지되려면 학술 서적을 진행할 수 있는 수준 높은 교정자의 육성, 그들이 안정적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충분한 비용 지급, 지속적 원고 제공 등이 필요하다. 일본 학술서적의 가격이 높은 이유일 테다. 학술 서적 초판 하드커버 가격이 어지간하면 4000엔 내외다.
언제나 말하지만 좋은 책을 내는 걸로 충분하지 않다. 좋은 노동을 할 구조를 설계하고 현실에서 이를 이룩할 의무가 출판사엔 있다. 좋은 책을 내지만, 좋은 노동을 제공하지 않는 출판사를 좋은 출판사라고 부르고 싶지 않고, 불러서도 안 된다.
현재 우리처럼 정직원 대우를 알바에 가까운 최저 임금으로 후려치는(최근 들었다, 세후 170만원..ㅠㅠ) 구조에선 정상적 학술 출판이 가능할 수 없다. 한국에서 그나마 나오는 학술 서적을 읽는다는 건 누군가의 뼈와 살로 이루어진 글자를 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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