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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시와 에세이 읽기

영원한 햇빛 외(최현우)

영원한 햇빛


그런 일이다

책장과 벽 사이에 끼어 있던

쓰다 만 공책을 발견하는 일

이곳에 살다가 저곳으로 옮겨본 적 있다는 것 

 

보이지 않는 곳

볼 수 없는 곳

그늘의 인대가 끊어진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 파양된 기록이

누군가 탈피하며 벗어 놓은 구겨진 허물이라는 것

 

열쇠를 가진 줄 알고

문의 저편만 찾아다니느라

구멍을 뚫고 다녔지

 

그러다 그 구멍

너를 모조리 삼켰고

 

모든 짐을 다 싸고도

들어갈 곳 없어

어제까지 식탁 위에 놓여 있던 공책이

사라졌다

 

사각형 햇빛 한 칸만 그 자리에 있다

 

중단할 수 없는 이 빛

자꾸만 대신하여 맨 위에 포개지는

끔찍해서 아름다웠던

햇빛 

====

 

어쿠스틱  

 

한사코 밀폐된 줄 알았으나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 남지 않았으나

그렇게 기대앉을 혼자만의 방이라는 건

기쁨의 작동음을 들어본 적 있어?

 

벽이 얇다는 것

윗집에서 생일 파티가 열리고 있다

 

아이들이 맥박처럼 뛴다

주머니에 가득한 동전처럼 말한다

 

유년의 임무란 세상의 전부를 놀이터의 부피와 포개는 걸까

누구나 한때, 계절의 속력을 스스럼없이 좋아하던 때

 

저 방과 이 방을 질주하며

집을 이해하지 않는 것

쿵쾅거리는 생명을 감추지 못하는 것

숨을 크게 불며 감정의 피막을 부풀리는 것

 

우리 그때

누가 먼저 손을 놓고 뛰기 시작했을까?

 

옆에 없었어

 

내가 만든 벽에 등을 대고 앉으면

내가 만들지 않은 발소리만

온몸을 돌아다닐 때

 

알아,

음악이 되는 법

시간이 왜 사람을 두드리는지 

 

우는 일과

울리는 일

하나의 몸에서 동시에 가능할 때

 

걸터앉아 어깨를 떨군 자세로

자신의 면적을 끊임없이 타격하는

카혼처럼

 

여기 있을 때

 

====

 

외면하는 기쁨

 

가구의 각도를 기억하는 사람은

혼자라는 말

 

없는 동안에도

이 집의 모든 모서리를 문지르고 간

햇빛이 있었겠으나

 

모든 게 그대로

왠지 안심이 된다

 

때를 놓친 분리수거

도시는 재활용을 발명하고 행복했을까

 

살은 삭혀서 가축의 사료가 되고

뼈는 따로 모아 태워 보낸다는데

 

나도 앉아서 다음 순서를 기다려 볼까

 

언제나 없었던 사람이

이제는 없겠다고 말한 저녁

 

이별 대신 야근을 하고 돌아와서

한 마리의 통닭을 부르는 건 우습지만

 

그러니까 나는 오늘

오늘의 밥을 씹으며

하루의 뭉친 힘줄을 모조리 삼켜야 하고

부드러운 증오를 가져야 한다

 

기름 냄새가 밴 이불을 덮고서

왠지 안심이 된다

 

독수리처럼

식탁 위의 가슴뼈를 배회하던 날파리떼가

내게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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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삿짐을 정리하면서 틈틈이 최현우 시집 <우리 없이 빛난 아침>(창비, 2025)를 읽었다.

대개 슬프고 외롭고 쓸쓸한 시들이다.

실패한 삶이라는 인식, 명랑성을 상실한 삶, 멍든 자아를 견디는 나날들 속에서 어떻게든 하루를 씹어 삼켜 보내는 청년의 모습이 선연하다.

이 청년을 구원한 건 사랑이다. "무엇이든 더 이상 반복할 수 없다고 확신했을 때/ 오월 햇빛 어디 안 간다는 사람 생겼습니다/ 그늘처럼 결혼했고요"(<지금이에요> 중에서)

그래서인지 3부에 나오는 <결혼>이라는 시는 아름답고 결연하며, <다식>은 따스하고 다정하다. 찾아서 읽어 보시길.

사랑은 둘의 발명이다. 인간은 혼자가 아니라, 어떻게든 둘일 때 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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