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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하 준의 『중국화하는 일본』(최종길 옮김, 페이퍼로드, 2013)을 읽다. 지난 한 달 동안 주말마다 틈틈이 요나하 준의 『중국화하는 일본』(최종길 옮김, 페이퍼로드, 2013)을 읽었다. 사실 이 책은 봄에 일본에 갔을 때 동경에서 만난 연구자 안천 선생이 요즈음 일본 출판계에 최대 화제가 된 책 중 하나라고 소개해 준 책이다. 송나라 이후 일본사[세계사]를 ‘중국화’와 ‘에도 시대화’라는 두 가지 축을 중심으로 강렬하게 설명해 내는, 상당히 흥미로운 논지를 펴고 있어 관심을 두었는데, 때마침 한국어판이 나와서 즉시 구입해 읽기 시작한 것이다.저자는 1979년 생으로 현재 서른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다. 일본에서 이 책이 나온 것은 2011년이니까 그때는 고작 서른세 살이었다. 삼십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이런 통찰력이 담긴 책을 쓸 수 있을까 싶었지만, 『도주론』(문아영 옮김,..
발자크의 『골짜기의 백합』(정예영 옮김, 을유문화사, 2008)을 읽다 삼류 작가의 시시한 작품보다 거장의 걸작을 오해하기는 얼마나 쉬운가. 어린 시절, 루카치의 ‘리얼리즘의 승리’라는 마르크스주의 문예 미학의 깃발 아래 읽었던 발자크의 작품들은 얼마나 재미없었던가. 그때는 소설 속 인물들의 인생은 보이지 않고, 작가의 사상이 왕당파에 가까운 데도 불구하고 그 핍진한 묘사 때문에 소설 내용이 ‘부르주아의 승리’라는 역사적 법칙의 엄중함에 따른다는 것만을 눈에 불을 켜고 확인하려 들었다. 작품마다 독자를 압도하는 거대한 관념들의 전개, 귀족 세력을 서서히 압박해 들어가는 상인 세력의 발흥, 그 갈피에서 오로직 역사 법칙에만 복무하는 듯한 인물의 행위들, 이런 독서는 결국 나의 발자크 읽기를 극도로 피로하게 만들었으며, 결국 나는 발자크 작품들을 제대로 읽지도 않은 채 극도로 ..
내면의 어둠과 사회의 어둠 ― 무라카미 하루키 풍월당 강연회에서 내면의 어둠과 사회의 어둠 ― 무라카미 하루키 풍월당 강연회에서 때때로 아무런 준비 없이 사람들 앞에서 짤막한 연설을 할 때가 있다. 본래 성격이 수줍어하는 편이라서 이럴 때는 정말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억지로 생각을 짜내고 심장 고동을 억누르면서 더듬더듬 한마디 보태는데, 대개는 횡설수설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지난 8월 2일 풍월당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과 음악’이라는 주제로 강연회가 열렸다. 풍월당 주인 박종호 선생의 진행으로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민음사, 2013)에 나온 프란츠 리스트의 「순례의 해」(라자르 베르만 연주)를 감상하는 자리였다. 독자 100여 명과 함께 번역자인 양억관 선생을 모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갑자기 나와서 한마디 하라는 ..
밑줄들 - 2013년 8월 18일 그동안 미루어 두었던 스크랩을 정리하면서 마음에 새겨 두었던 구절들을 여기에 챙겨 둔다. 1 “사진은 영원을 밝혀준 그 순간을 영원히 포획하는 단두대다.”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묘비명에 새겨져 있다는 글이다. 《한국경제신문》 연재 칼럼 「이 아침의 인물」(2013년 8월 3일)에서 옮겨 적는다. 영원의 순간화 또는 순간의 영원화는 보들레르 이후 현대 예술의 중심적 주제이다. 포획이라는 표현은 적절하다. 예술적 천재 없이는 불가능한 기획이다. 많은 일들은 일상이 되어 왔다가 그대로 지나가 소멸해 버린다. 소멸에 저항하는 것, 그리스 신화 식으로 말하면 하늘에 올라가 별이 되는 것은 근대 이후에는 오로지 영웅 또는 예술가에게만 허락된 권능이다. 단두대라고 한 것은, 그 이유를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타나토스를..
책 읽기가 섹시한 11가지 이유 주말이 되면 에버노트(Evernote)에 저장해 두었던 책 관련 소식들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번 주에 RSS 세계에서 가장 화제가 된 것은 미국의 작가 저스틴 머스크(Justin Musk)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 「책 읽기가 섹시한 11가지 이유」였다.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 역시 하도 책을 읽지 않으니 별의별 아이디어가 다 튀어 나온다. 재미로, 아래에 옮겨 소개한다. 책 읽기가 섹시한 11가지 이유11 reasons why reading is sexy 만약 너희들이 사람을 만나고 책을 읽지 않는다면, 지금으로부터 5년이 지나도 너희들 인생은 요 모양 요 꼴로 변하지 않을 것이다. ― 존 우든(John Wooden) 1. 욕망은 마음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책 읽기 역시 그렇다.)2. 책 읽기..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진영화 옮김, 책만드는집, 2011)을 읽다 한 나라의 문학이 그 형성 초기에 시대를 뛰어넘는 천재를 만난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다. 특히 아시아나 아프리카 등과 같이 서양에서 발달해 온 여러 양식들을 자국의 문학 전통 속에 수용해 새롭게 만들어 가야 했던 나라들은 더욱더 그렇다. 중국에 루쉰이 없고 일본에 나쓰메 소세키가 없고 한국에 이광수가 없었다면, 현재의 동아시아 문학은 아마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루쉰이나 이광수의 문학과는 달리 나쓰메 소세키한테는 통쾌한 유머가 있다. 루쉰의 웃음은 가혹할 만큼 쓰디쓰고 이광수는 전혀 웃을 줄 모르는데, 소세키 혼자 웃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속해 있던 국가가 서구 열강에 대한 수비에서 그치지 않고 주변 국가들에 대한 공격(침략)을 택했던 것과 연관이 있을까?지난 열흘 정도에 걸쳐서 나쓰메 소세키..
김영하,『아랑은 왜』(문학동네, 2010)를 읽다 김영하,『아랑은 왜』(문학동네, 2010)를 읽었다. 김영하 소설을 모두 모아서 읽기 시작한 게 6월 중순이었으니 벌써 두 달이 지난 셈이다. 그동안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문학동네, 2010), 『호출』(문학동네, 2010), 『엘리베이터에 낀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문학동네, 2010)에 이어 네 번째 작품이다. 그 사이에 신작 경장편 『살인자의 기억법』(문학동네, 2013)을 읽었으니 모두 다섯 권의 작품을 읽었다. 쌓아 놓고 읽는 작품들이 많아서 본래 예상보다는 조금 늦어지고 있지만, 빠르다면 빠르고 느리다면 느린 템포다. 약간의 변명을 하자면, 『아랑은 왜』를 읽고 난 후 일종의 회고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작품이 아니라 작품 바깥의 일들이 더 많이 떠올랐던 것이다.『아랑은 왜』는 아..
슈타이들조차 책을 만드는 데에는 편집자가 필요하다 슈타이들조차 책을 만드는 데에는 편집자가 필요하다― 대림미술관의 슈타이들 전시회를 다녀와서 전시회 관람을 그 자리에서 끝내는 것은 대개의 경우 무척 어리석은 일이기 쉽다. 물론 현장의 생생함이 만들어 내는 활기 찬 리듬, 눈을 사로잡는 강렬한 색채와 그들을 빚어 내는 공간의 놀라운 조화를 전적으로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장의 인상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지는 법이라서 며칠 또는 몇 주의 시간이 지나면 메모 몇 줄과 머릿속에서 공명하는 몇 덩이 생각들로 약화된다. 윤곽선은 희미해지고 느낌은 잔잔해진다. 현장의 감격은 사라지고 냉냉한 분석만이 남는다. 그러나 나는 또 알고 있다. 인상이란 우리를 속이기 쉽다는 것을, 진정한 전시회는 도록을 읽는 육체 노동과 사색의 시간을 며칠 또는 몇 주 동안 필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