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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절각획선(切角劃線)

밑줄들 - 2013년 8월 18일


그동안 미루어 두었던 스크랩을 정리하면서 마음에 새겨 두었던 구절들을 여기에 챙겨 둔다. 


“사진은 영원을 밝혀준 그 순간을 영원히 포획하는 단두대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묘비명에 새겨져 있다는 글이다. 《한국경제신문》 연재 칼럼 「이 아침의 인물」(2013년 8월 3일)에서 옮겨 적는다. 영원의 순간화 또는 순간의 영원화는 보들레르 이후 현대 예술의 중심적 주제이다. 포획이라는 표현은 적절하다. 예술적 천재 없이는 불가능한 기획이다. 많은 일들은 일상이 되어 왔다가 그대로 지나가 소멸해 버린다. 소멸에 저항하는 것, 그리스 신화 식으로 말하면 하늘에 올라가 별이 되는 것은 근대 이후에는 오로지 영웅 또는 예술가에게만 허락된 권능이다. 단두대라고 한 것은, 그 이유를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타나토스를 파고드는 에로스의 창조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순간의 장절한 미학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것일까. 한 사람이 인생을 살고 난 후 그 묘비명에 이와 같은 구절을 새길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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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작품과 자기 자신을 분리시킬 것인가?/ 작품이 끝날 때마다 나는 한 번씩 죽는다”(102쪽) 이런 사람은 홀로코스트가 아니었어도 매일 다시 태어났을 것이다.

《한겨레》에 매주 실리는 「정희진의 어떤 메모」는 기다렸다가 꼭 챙겨 읽는 칼럼이다. 정희진 글의 매력은 한없이 솔직한 고백의 펜싱에 있다. 망설이고 머뭇대는가 하면 어느새 전진해 심장 어림을 칼로 찔러 댄다. 이산하 시인이 편역한 프리모 레비의 시집 『살아남은 자의 아픔』(노마드북스, 2011)에 대한 짤막한 칼럼인 이 글에서 정희진은 역사의 준엄함 속에 노출된 한 예민한 지식인(프리모 레비, 그는 오시비엥침, 그러니까 아우슈비츠에 끌려갔다가 살아 돌아왔으며 그로 인해 아틀라스처럼 인류사 전체를 홀로 떠안고 남은 인생을 살아야 하는 가혹한 짐을 지게 되었다.)의 심정을 따라 간다. 현실의 냉혹함 속에서 심정의 움직임을 읽는 것, 이것이 정희진 글의 진짜 매력이다. 이 매력이 프리모 레비의 애끓는 시와 맞물리면서 거대한 진폭을 마음에 남긴다. 짧지만, 아니 짧아서 좋은 칼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