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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소설 / 희곡 읽기

김영하,『아랑은 왜』(문학동네, 2010)를 읽다



김영하,『아랑은 왜』(문학동네, 2010)를 읽었다. 김영하 소설을 모두 모아서 읽기 시작한 게 6월 중순이었으니 벌써 두 달이 지난 셈이다. 그동안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문학동네, 2010), 『호출』(문학동네, 2010), 『엘리베이터에 낀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문학동네, 2010)에 이어 네 번째 작품이다. 그 사이에 신작 경장편 『살인자의 기억법』(문학동네, 2013)을 읽었으니 모두 다섯 권의 작품을 읽었다. 쌓아 놓고 읽는 작품들이 많아서 본래 예상보다는 조금 늦어지고 있지만, 빠르다면 빠르고 느리다면 느린 템포다. 약간의 변명을 하자면, 『아랑은 왜』를 읽고 난 후 일종의 회고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작품이 아니라 작품 바깥의 일들이 더 많이 떠올랐던 것이다.

『아랑은 왜』는 아랑 전설을 모티프로 과거의 민담이 어떻게 현재의 소설 서사로 변주될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자문하는 메타 픽션 형식의 작품이고, 소설가가 자신의 소설에 대해 끊임없이 독자에게 말을 걸면서 서사를 진행시키는 대화 소설이며, 소설가가 자신이 쓰는 소설의 내용과 형식을 어떻게 구체화해 가는지를 보여 주는 소설가 소설이기도 하다. 형식에 대한 고민은 김영하 소설에서 늘 일어났던 일이었고, 이 작품 이전에 나온 많은 소설에서 그가 한국 소설 전통에 전혀 기대지 않은 새로운 소설 형식을 여러 번 보여 줬던 것을 생각하면 이 작품의 시도가 그다지 낯선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익숙하다고 할 수 있다.

상상력을 부리면서 이야기를 끌어 가는 솜씨만은 대단하다는 느낌이 든다. 한때 소설을 쓰고 현재 번역을 하는 화자 ‘나’와 그의 애인 영주의 이야기는 기존 자기 소설의 반복이지만, 이 이야기의 틈 속으로 조선 명종 때 밀양을 배경으로 억울하게 살해된 아랑의 해원(解怨)을 둘러싼 아랑 전설을 『한국구비문학대계』, 『임꺽정』, 딱지본 소설 『정옥낭자전』, 『조선왕조실록』을 넘나들면서 실감나게 재구축해 가는 것은 자칫 지루하기 쉬운 지식 나열식 너스레들에 넘치는 탄력을 부여한다.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아랑은 왜』에는 이전의 김영하 소설과는 어쩐지 다른 분위기가 깃들어 있다. 어떤 초조함 또는 두려움 같은 것이 느껴지는 것이다. 찬사를 바친 수많은 논문과 비평이 존재하는 지금에 와서 이 소설을 평가해서 무엇하랴만, 흔히들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새로운 탐구이자 한국 소설의 새로운 경지라고 불렸던 김영하의 매력적인 서사 세계가 여전히 양쪽 이야기 모두에서 위력을 발휘하는데도 그 탐구 자체에 결정적인 무엇인가가 누락되어 있으며, 그래서 어딘지 식상하다는 생각을 도저히 피할 수 없다. 소설적 탐구의 형식은 새롭지만 이야기 자체가 도저히 새로워지지 않는 것이다. 이런 진술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한데도 소설을 읽고 나서 한참 지난 후인 지금도 여전히 버릴 수 없는 것이다.

등단 10년이 지나지 않은 작가가 어느새 낡아 버렸다는 것. 사실 이 이상한 조로 현상이 김영하와 동세대를 살아 간 작가들 모두의 지속적 고민일지도 모른다. 문장은 점차로 능숙해지고, 그 아름답고 간결한 문장이 빚어 내는 이야기는 늘 신선하고 팔딱팔딱거리는데, 그 강도(intencity)가 일정한 수준에 머무르면서 절대로 높아지지 않았던 것이다. 왜?

어쩌면 1980년대로부터 떠나기를 그토록 간절히 원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집단적 정치 의식이 섬세한 한 주체를 압도했던 시대로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기에, 그 시대의 가장 훌륭한 유산인 도덕 의식 전체를 너무 쉽게 폐기처분해 버린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입으로는 만날 혁명이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사실은 쾌락주의적 주체를 서둘러 밀수입하느라고 시대에 대한 탐구도 주체에 대한 탐구도 사실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던 데에서 미성숙이 온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야기의 강도가 한계에 이르렀을 때 물어야 했던 것은 새로운 이야기의 등장이나 형식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이야기의 새로움을 만들어 내는 근원적인 힘, 그러니까 이야기의 도덕적 차원에 대한 질문이어야 했을 것이다. 『아랑은 왜』에는, 어쩌면 초기 김영하 소설 전체에는 주체의 도덕적 차원에 대한 질문이 근본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확실히 김영하가 자주 소재로 삼는 에로스나 타나토스는 작은 도덕 따위는 쉽게 초월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김영하 소설의 매력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이야기의 경쾌함을 위해 인물들의 도덕을 삭제해 버리는 것.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의 킬러처럼.

그러나 에로스나 타나토스의 세계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주체의 도덕적 갈등이 오히려 강렬해진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작가가 그려 내는 에로스나 타나토스의 세계에도 역시 어떤 근본적 한계가 생긴다. 이야기 속 아랑을 둘러싼 김억균의 수사와 그를 둘러싼 송사를 끌어냈던 매력적인 논리적 추론은 어사 조윤이나 밀양부사 이상사의 노회함 속에서 유야무야 흩어져 버리면, 아랑의 비극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또 영주의 죽음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녀들의 죽음은 어떤 의미 탐구 없이 단지 다른 이야기를 촉발하는 한 계기로만 존재해도 좋은 것일까.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었는데도 마음에 걸려 남는 것이 거의 없고, 단지 문예 분석의 대상으로서만 소설이 남는다면, 도대체 소설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이 탐구는 무엇 때문에 일어나 소설로까지 쓰였단 말인가.

이 작품 중간에 작가가 인용했던 『오델로』에서 보여 주었듯이, 죽음이나 사랑은 너무나 강렬해서 반드시 주체의 도덕적 선택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오델로는 말한다. “사랑하는 까닭에 더욱 미운 것.” 이것이 바로 살인의 도덕이다.) 작가도 잘 알듯이, 물론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지나가다가 짜증난다고 살인이 일어나기는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빈번히 일어나는 일일지라도 이야기 속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죽음이나 사랑이 결부된 사건이 바로 그런 사건이고, 죽음과 사랑이 결합된 사건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작가가 물었어야 하는 것은, 김억균이나 이상사나 조윤의 선택이 아니라, ‘나’의 선택이 아니라, 그러니까 이야기꾼의 선택이 아니라 이야기꾼이 도저히 선택할 수 없었던 것이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이 소설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질문 자체를 계속 내 안에서 키워 가기 위해 여기에 심각하게 물어 둔다.

다음 작품은 『검은 꽃』(문학동네, 2010)이다. 거기에서는 어떤 질문들이 생겨날 것인가.



=== 책 속의 구절들

― ‘익숙한’ 이야기를 ‘다르게’ 쓴다는 것은, 만만찮은 일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야기꾼이라는 작자들이 과거나 지금이나 밥 먹고 하는 일이 그거 아닌가. 다 아는 이야기를 다르게 말하기.

― 현실에서는 빈번히 일어나는 일일지라도 이야기 속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많은 작가들이 백화점이 붕괴되고 다리가 무너지면서 큰 혼란이 벌어지는 상상을 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걸 소설이나 영화로 만들지는 않았다. 그런 일은, 현실에서나 용납될 성질의 일이다.

― 현실에서는 어떤 일도 받아들여진다. ‘충격적인 일’이라고만 말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그 ‘충격적인 사건’은 곧 잊혀진다.

― 독자들은 자신들의 눈높이와 가장 비슷한 인물의 말을 귀여겨 듣는다.

― 소설 속의 인물들은 창조된다기보다는 모방된다. 어떤 인물은 작가 자신을, 작가의 아버지를, 옆집 아저씨를, 옛날 여자친구를 닮는다.

― 현실은 어떤 면에서 이야기보다 훨씬 단순하다. 현실 속의 범인들은 너무도 쉽게 범행을 자백하고 머리 따위는 전혀 쓰지 않는다.

― 우리는 소설 속의 인물들에 대해 많은 것을 모른다. 사실은 현실의 인물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 진실은 할리우드 영화처럼 두 시간 안에 밝혀질 수 있는 걸까? 아니, 두 시간 안에 밝혀지는 것을 진실이라 부를 수 있는 걸까? 과연 그래도 되는 걸까?

― 현실의 윤리를 소설 속에 대입할 필요는 없다. 마담 보봐리나 춘희처럼 그저 그들은 이야기 속에서 죽을 운명을 타고났을 뿐이다.

― 아, 향기로운 입김, 정의의 신도 이 냄새를 맡는다면 칼을 부러뜨릴지도 몰라. 또 한 번, 또 한 번. 죽어도 이대로 있어 다오. 죽여 놓고 사랑하지. 또 한 번만. 이게 마지막이다. 이 향기에 그 독소가 웬일일까. 내 어찌 울지 않으랴! 그러나 이 눈물은 잔인한 눈물. 아니, 이 눈물은 성스러운 눈물. 사랑하는 까닭에 더욱 미운 것...... (『오델로』)

― TV는 눈물을 감추기에 가장 좋은 도구다. 우리는 암묵적으로 TV와 사람 사이에 끼어들지 않아야 한다는 묵계 속에 살고 있다. 그렇기에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우는 사람의 눈을 들여다볼 수가 없다. TV가 켜지는 순간, 시청자와 TV 사이엔 눈에 보이지 않는 강력한 보호막이 형성되어 그 사이로 틈입하는 모든 것을 퉁겨내 버리는 것이다. 가족도 연인도 이데올로기도, 심지어 죽음도 그 사이에 끼어들 자격이 없다.

― 그는 그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책더미 속으로 몸을 파묻는다. 사상의 무덤, 인류의 기억 처리장, 활자들의 수용소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