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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책 읽기

요나하 준의 『중국화하는 일본』(최종길 옮김, 페이퍼로드, 2013)을 읽다.



중국화하는 일본 표지


지난 한 달 동안 주말마다 틈틈이 요나하 준의 『중국화하는 일본』(최종길 옮김, 페이퍼로드, 2013)을 읽었다. 사실 이 책은 봄에 일본에 갔을 때 동경에서 만난 연구자 안천 선생이 요즈음 일본 출판계에 최대 화제가 된 책 중 하나라고 소개해 준 책이다. 송나라 이후 일본사[세계사]를 ‘중국화’와 ‘에도 시대화’라는 두 가지 축을 중심으로 강렬하게 설명해 내는, 상당히 흥미로운 논지를 펴고 있어 관심을 두었는데, 때마침 한국어판이 나와서 즉시 구입해 읽기 시작한 것이다.

저자는 1979년 생으로 현재 서른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다. 일본에서 이 책이 나온 것은 2011년이니까 그때는 고작 서른세 살이었다. 삼십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이런 통찰력이 담긴 책을 쓸 수 있을까 싶었지만, 『도주론』(문아영 옮김, 민음사, 2012)의 아사다 아키라도,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은미 옮김, 문학동네, 2007)의 아즈마 히로키도 이십대 후반에 이미 학계의 풍향을 바꾼 대작들을 쏟아낸 걸 생각해 보면 일본에서는 그리 어색한 일만은 아니다. 하나의 천재가 화산처럼 분화해 스스로 빛을 낸 것이 아니라 바탕에 깔려 있는 학문 연구의 두께가 천재를 만들어 냈다고 생각하면 옳을 것이다. 후지 산은 언제든지 불을 뿜어 낼 수 있는 활화산이다. 이런 천재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는 일본 학계가 두렵고, 부럽다. 한편으로 이 젊은 천재들을 책까지 끌어내고 응원한 일본 출판계의 편집력이 무섭고, 부럽기도 하다. 편집자라면 이 책을 읽으면서 점차 갈증이 느껴지고 목이 말라 와야 하고, 실제로 그렇게 느껴져 마지막에는 혀가 타서 갈라질 것만 같았다.

일본 역사학의 성과를 토대로 몰락해 가는 현재 일본의 상황과 그에 대한 해법을 모색하고 있는 이 야심 찬 책은 근대화, 그러니까 역사의 종언이 10세기 송나라에서 이미 완성되었다는 충격적 주장(저자에 따르면, 역사학계에서는 이미 상식이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국내 역사 전공자에게 확인해 볼 생각이다.)과 함께 시작한다. 

요나하 준에 따르면, 우리가 근대화 또는 세계화라고 불러온 것은 실질적으로는 ‘중국화’이며, 그 핵심은 “귀족 제도의 전폐와 황제에 의한 전제 지배”이고, 그것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말한다면 “경제와 사회를 철저하게 자유화하는 대신에 정치 질서는 일극 지배에 의해 유지하는 틀”을 만드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정치적으로는 일원적 지배(제왕 정치), 사회적으로는 특권 타파(과거제 실시), 경제적으로는 자유 시장 경제가 중국화의 핵심인데, 이 세 가지는 서양의 근대가 이룩한 것과 논리적으로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사상사 차원에서 보면, 독점 권력을 가진 황제를 견제하기 위해 보편이념(주자학)을 내세워서 황제를 성인화(聖人化)하는 것이다. 이는 황제가 실제로 훌륭하거나 뛰어나서(가끔 그럴 경우도 나타날 수는 있겠지만) 그를 하늘의 아들로, 이상적 질서의 현신으로 떠받드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그러는 것이 그에 대한 가장 강력한 견제 수단이 될 수밖에 없기에 그를 보편이념을 내세워 찬양하는 것이다. 이라크에서 “정의로운 전쟁”을 수행한 절대 권력 미국에게 끊임없이 ‘정의란 무엇인가’를 질문해서 그 양심을 괴롭히고 각성을 촉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나 할까.(물론 미국도 스노든 사태에서 보았듯이, 국익이라는 또 하나의 정의를 내세워 눈 한 번 깜빡하지 않는다.)

어쨌든 송나라에서 출현한 중국화는 몽골 제국의 서진에 따라, 이슬람 세계를 거쳐서 점차 서양 전체로 확산되었으며, 우리가 일반적으로 근대화라고 부르는 것이야말로 사실은 후기 근대화, 그러니까 서양이 중국을 따라 잡은 역사적 사건이다. 이에 비해 일본은 중국화를 수용하지 못하고 에도라는 봉건적 시스템에 안주해 버려서 (지역에 기반을 둔) 상류 귀족 가문들 간에 통치 권력을 나누고 세습하는 대신에 영지민 전체의 생활을 대신 책임져 주는 길을 택했다.(저자는 이를 봉건 유제라고 하고, 중국화에 저항해서 쇄국과 함께 이런 길을 택한 것을 에도시대화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서 “가능한 한 [특권을 가진] 고정 집단을 만들지 말고 자본과 사람의 유동성을 최대한으로 높이는 한편, 보편주의적인 이념에 기초한 정치의 도덕화와 행정 권력의 일원화를 통하여 시스템의 폭주를 제어하려고 하는 사회”(중국화)가 이른바 현재의 글로벌 스탠더드라면, 일본은 오늘날까지도 기나긴 에도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에(그 결과는 한국 전쟁 등 여러 역사적 우연과 겹쳐 가장 민주적으로 사회주의적인 나라가 되었다.) 권위와 권력이 분리되어 힘이 다원화하고(파벌 정치, 과거 일본의 자민당이나 요즘 한국의 민주당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정치는 지역이나 단체 간 이권 분배로 기능할 뿐 보편이념의 실현이라고 생각하지 않고(국회에서 흔히 보이는 토건 예산을 둘러싼 숫자 싸움과 배후 조정), 지식이나 도덕성 같은 인격적 능력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권력이나 금력으로 곧바로 전환되지 않고(지식인과 정치 또는 행정의 분리), 농업 세습을 기초로 하는 지역 사회의 결속력에 의존하는 사회(농업 개방에 대한 지역민들의 반대 투쟁과 이에 호응하는 정치 집단), 어떤 단체에 대한 소속에 근거한 인간 관계의 공동체화(지역, 학연, 사연의 출현과 이를 근거로 한 차별과 역차별)가 지속되었다.

그런데 저자 요나하 준에 따르면, 현재 일본 사회는 더 이상 중국화의 흐름을 저지할 수 없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기득권과 생활 보장을 대신해 주던 촌락이나 집안이라는 집단이 내부 모순을 견디지 못하고 붕괴해 버린 것이다. 국가를 대신해 평생 생활을 보장하던 기업(촌락)은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점차로 경영난에 빠지는 등 복지 대체 기능을 상실해 가고 있으며, 노후를 책임져 주던 가정(집안)은 이혼이나 미혼의 증가로 더 이상 사회 안정망의 수용처가 되지 못하는 등 시스템 전체가 위기에 빠져 있다.(이는 현재 한국 사회를 읽는 데에도 상당한 시사점을 준다. 한국의 지식인들이 이 책을 읽고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점에 있다. 일본보다는 다소 낫지만, 우리 국가 역시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지 않은가.) 

이를 넘어서기 위한 대안적 사고로 저자는 ‘중국화’를 심각하게 재검토할 것을 제안한다. 마지막 장에 나오는 미래의 시나리오들은 상당히 시사적이다. 

첫째, 다시 에도시대로 돌아가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일본형 봉건주의(기묘한 사회민주주의)란, 기업이 파견 사원이나 일용직 사원을 고용하지 않는 대신에 정사원만을 최소로 고용해서 밤 늦도록 죽어라 과잉 노동을 시키는 시스템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세계화 시대의 경쟁에는 맞지 않는다. 게다가 전 사원을 회사별 조합에 가입시켜 집단적 윤리 아래에서 교섭하게 하는 것 역시 능력 있는 개인이 전 세계를 떠돌아 다니면서 일하는 유목적 세계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게다가 이 시스템의 근저에는 남녀를 차별하여 남성만 정사원으로 고용하고 여성을 전업주부로서 남성에 예속시키는 것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이는 남편과 이혼하면 먹고살 수 없도록 집안 단위로 남성 우위의 복지 제도를 강력하게 실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가령, 남편의 의료보험에 아내를 자동으로 포함시키는 방식이 그 한 예이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는 오늘날에는 지속될 수 없다. 그 결과, 고용과 해고가 자유롭지 않은 일본을 피해 자본은 해외로 점차 생산 거점을 옮기고 있으며, 여성들은 결혼하지도, 출산하지도 않는 방식으로 일본 사회에서 뛰쳐나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시장 주도로 자기 책임 사회를 만드는 개혁(중국화)을 실시하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미국처럼 대량으로 돈을 찍어 내도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는 제국을 제외한다면, 북유럽식으로 세금을 충분히 증액하여 복지 재원을 충당하는 방법도 있기는 하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 책에서 충분히 다루지 않는다. 아마 전후 일본사회에서 이미 고민이 끝난 시스템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 중국화를 포기하고 쇄국을 택해 북한처럼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북한 체제란 “조선의 유교 원리주의적인 왕권과 단군 신화가 존재하는 곳에서 제국주의 시대 일본의 천황제와 국체론, 전시 하의 총력전 체제와 군국주의, 독립 후에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스탈린주의와 공산 중국의 마오쩌둥주의까지 근대 동북아시아 전역에서 다양한 경로로 흘러들어간 이데올로기의 용광로”인데, 이는 어떻게 보면 일본식 에도시대화가 북한에서 생겨나서 어떠한 변화도 거부한 채 갈 때까지 간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는 가능할 수는 있어도 현상적으로 볼 때 절대로 피해야 하는 선택지이다.

셋째, 헌법 9조를 비롯해 일본 헌법에 들어 있는 이상주의적 요소를 보편 이념으로 삼아서 사회 개혁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가령, 저출산 고령화에 인구감소 사회인 일본을 더 이상 일본인만으로 경영할 수 없기 때문에 전 세계에서 이민을 받아들여 일본의 노인을(즉, 사회복지 시스템을) 부양하는 시스템으로 전환하든지(일본어 학습 비용을 국가가 지불해서라도 제3세계 사람들이 일한다면 서구보다는 일본을 우선 희망하도록 만들기), (미국이 이상주의적인 독립선언문이나 게티즈버그 연설을 이상화해서 미국이라는 이상주의를 만들어 냈듯이) 평화를 보장하는 헌법 9조를 보편 이념으로 삼아서 어떻게 헌법 9조를 중국에 강제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 등을 말한다. 일본 내에서 이념의 보편성, 정치의 세계성을 확보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것이 중국화의 물결 속에서 일본의 미래를 생각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올해 출판된 수많은 인문서들 중에서 필독에 속하는 책이다. 일본 사회와 역사를 다루기 때문에 우리와 관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식견이 짧은 것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중국화 테제는 인류 전체가 고민해야 할 보편 현실에 속한다. 이는 집단 시위와 같은 정동적 대응으로는 기분은 좋겠지만 근본적으로 막아 낼 수 없으며, 합리적이고 치밀한 대응 전략을 수립해 차분하고 냉철하게 접근하는 것으로만 간신히 시야에 넣을 수 있다. “안이한 희망은 없으며 그저 진부하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반복이 있을 뿐”이라는 저자의 탄식은 우리 모두의 탄식이기도 하며, “2010년대를 맞이하는 시점에서 ‘일본 사회의 종언’이 서서히 분명해지는 상황이었고, ‘3·11’은 그것을 명확하게 보여 준 최후의 일격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저자의 진단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아래와 같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은 어쩌면 비극을 미연에 차단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지식인의 고민이기도 할 것이다.


정말로 지금부터 ‘탈원전’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원전 사업의 철수에 따른 지역 경제의 정체, 나아가 전력 비용의 증대에 따른 일본 전체의 산업 공동화가 가져올 고용의 감소도 시야에 넣어서 지금이야말로 ‘고용에 의존하지 않는 복지’를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지역이나 직장마다 결성되어 있던 유대를 잃어버려도 또한 우리들은 살아갈 수 있을까요. 혹은 중간 집단이 없이 유민화한 국민과 생활의 고삐를 한손에 쥐고 있는 국가가 대치할 경우 여기에는 일본사에서 이전에 없던 전제 권력이 나타나지 않을까요.

위와 같은 문제를 탐구하는 힌트를 이러한 상황의 대선배라고도 할 수 있는 중국의 역사에서 찾아가면서 우리들은 모색을 계속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중략) ‘올바른 대답’이 자연스럽게 발견되고 무엇 하나 고민할 필요가 없는 이상적인 삶이 실현된다는 설정 자체가 철저하게 잘못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