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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소설 / 희곡 읽기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진영화 옮김, 책만드는집, 2011)을 읽다


나쓰메 소세키

한 나라의 문학이 그 형성 초기에 시대를 뛰어넘는 천재를 만난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다. 특히 아시아나 아프리카 등과 같이 서양에서 발달해 온 여러 양식들을 자국의 문학 전통 속에 수용해 새롭게 만들어 가야 했던 나라들은 더욱더 그렇다. 중국에 루쉰이 없고 일본에 나쓰메 소세키가 없고 한국에 이광수가 없었다면, 현재의 동아시아 문학은 아마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루쉰이나 이광수의 문학과는 달리 나쓰메 소세키한테는 통쾌한 유머가 있다. 루쉰의 웃음은 가혹할 만큼 쓰디쓰고 이광수는 전혀 웃을 줄 모르는데, 소세키 혼자 웃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속해 있던 국가가 서구 열강에 대한 수비에서 그치지 않고 주변 국가들에 대한 공격(침략)을 택했던 것과 연관이 있을까?

지난 열흘 정도에 걸쳐서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진영화 옮김, 책만드는집, 2011)를 틈틈이 모두 읽었다. 『도련님』(양윤옥 옮김, 좋은생각, 2007)에 이어서 소세키 작품으로는 두 번째이다. 망오십(望五十)에 읽어 비로소 그 통쾌한 맛을 알게 되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이 통쾌함의 저편에서 루쉰이나 이광수의 소설들이 떠오르는 것은 어쩐 일일까. 일본이 재무장에 시동을 걸고 있는 요즈음, 광복절에 마침내 소설을 모두 읽고 나서 문득 이 생각이 들었다. 

나쓰메 소세키의 데뷔작이자 출세작인 이 소설은 근대화의 물결이 밀려 오는 시기를 배경으로 해서 일본 지식인들의 허위 의식과 정신적 무능력 또는 방황을 통쾌하게 풍자하고 있다. 이 작품은 특이하게도 고양이의 시각에서 쓰여 있는데, 이는 사람들로서는 절대로 감지할 수 없는 타인의 내면을 자유자재로 드나들거나 대화 사이사이에 마음대로 끼어들어 비평을 날리기 위한 소설적 장치이다. 

미물이자 영물인 고양이의 눈을 통해서 작가는 신학교  영어 선생인 주인과 그 주변 지식인들이 시대를 선도해 포부를 실현하지도 못하고 양심에 눈을 감고 물질화되어 가는 시대를 추종하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태도를 신랄하게 폭로하고 있다. 주인과 그 동료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여러 사건들과 대화들을 통해 메이지 시대 근대화의 물결이 밀려오는 일본 사회의 온갖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것이다. 거기에는 메이지 시대 사람들의 문명, 사랑, 재산, 교육, 학력 등에 대한 태도가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다. 한 사회의 전체성을 재미와 흥미를 놓지 않는 가운데에서도 이토록 정교하게 표현해 낸 것은 정말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고전의 이름에 전혀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 책 속에서

― 나는 고양이라 한다. 아직 이름은 없다. 

― 서생이라고 하는, 인간들 중에서도 가장 영악스러운 종족이었다.

― 원래 인간이란 자신의 역량을 자만하여 모두들 우쭐해하고 있다. 인간보다 더 강한 존재가 나와 혼내 주지 않는다면 앞으로 어디까지 거만을 떨는지 알 수 없다.

― 모든 안락은 뼈저린 고통을 겪고 나서야 오는 것이다.

― 인간이란 시간을 때우기 위해 억지로 입을 놀려, 우습지도 않은 일에 웃거나 재미도 없는 일에 기뻐하는 것 외에는 달리 재능이 없는 자들이라고 생각한다.

― '여느 때처럼'이란 새삼스럽게 해석할 필요도 없이, '자주'를 제곱한 정도를 나타내는 말이다. 한 번 한 일은 두 번 하고 싶고, 두 번 시도한 일은 세 번 시도해 보고 싶은 것은 인간에게만 한정된 호기심이 아니다. 고양이라 할지라도 이 심리적 특권을 갖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세 번 이상 거듭할 때 비로소 '습관'이란 말을 적용하여, 이 행위가 생활상의 필요로 진화하는 것 역시 인간과 다름없다.

― 무릇 세상에 천한 직업이라 하면, 탐정과 고리대금업자만틈 천한 직업은 없다고 생각한다.

― 하늘과 땅을 만들기 위해서 인류가 얼마만큼의 힘을 기울였느냐 하면, 전혀 거든 게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만들지 않은 것을 자기 소유로 정하는 법은 없으리라. 자기 소유로 정하는 것까진 괜찮다 하더라도, 남의 출입을 금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이 넓디넓은 땅에다 약삭빠르게 울타리를 두르고 말뚝을 박아 누구누구의 소유지라고 명확히 구획 짓는 것은, 마치 저 창공에 새끼줄을 치고서 이 부분은 내 하늘이고 저 부분은 네 하늘이라고 등록하는 것과 같다. 가령, 토지를 쪼개어 한 평당 얼마라는 식으로 소유권을 매매한다고 한다면,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를 한 자 입방으로 나누어 잘라 팔아도 된다는 이치다. 공기를 잘라 파는 게 불가능하고, 하늘에 새끼줄을 치는 게 부당하다면, 땅을 사유하는 것도 불합리하지 않은가?

― 보통이라고 하면 괜찮을 것 같지만, 보통이 극에 달해 평범의 당(堂)에 오르고, 용속(庸俗)의 실(室)에 들게 되면, 오히려 불쌍하기 그지없다.

― 돈이라는 게 요물이라서, (중략) 돈을 벌려면 삼무술(三無術)을 써야 한다는 거야. 의리 무, 인정 무, 수치심 무, 이래서 삼무가 된다는 거야.

― 그리스 사람이 경기에서 얻는 상은 그들이 연출하는 기예 그것보다도 귀중한 것이지. 그렇기 때문에 포상도 되고 장려의 도구도 되는 거지. 그러나 지식은 어떤가? 만일 지식에 대한 보수로서 뭔가를 주려고 한다면 지식 이상의 가치 있는 것을 주어야만 하는데, 지식 이상의 진귀한 보배가 이 세상에 있을까? 물론 있을 리가 없지. 어정쩡한 것을 주면 지식의 위엄을 손상시킬 뿐이야. 그들은 지식에 대해서 천 냥 금화 상자를 올림포스 산만큼 쌓아 놓고, 크로이소스 왕의 재물을 다 부어서라도 상당한 보수를 주려고 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간파했지. 그리고 그 이후로는 아주 깨끗이 아무것도 안 주기로 해 버렸어.

― 불필요한 저항은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것이 요즘 세상 방식으로, 쓸데없는 말싸움은 봉건 시대의 유물이라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인생의 목적은 말이 아니라 실행에 있다. 일이 자기 생각대로 착착 진척된다면, 그것으로 인생의 목적은 달성되는 것이다. 고생과 걱정과 언쟁 없이 일이 진척된다면, 인생의 목적은 극락의 방법으로 달성되는 것이다.

― 형체 이외의 활동을 볼 수 없는 자한테 자기 영혼의 빛을 보라고 강요하는 건 마치 중에게 머리를 땋으라고 재촉하는 것과 같고, 다랑어에게 연설을 해 보라는 것과 같고, 전철에게 탈선을 요구하는 것과 같으며,....

― 맹호도 동물원에 들어가면 똥돼지 옆에 자리를 잡고, 기러기도 새 장수에게 잡히면 병아리와 같은 도마 위에 오른다.

― 가죽을 벗고 살을 벗고 뼈만으로 바람을 쐬었으면 좋겠다. (시드니 스미스)

― 제 욕심에 볼일을 주제에 넘칠 정도로 만들어 놓고는 힘들어, 힘들어 하는 것은 제 손으로 불을 활활 지펴 놓고 더워, 더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 깃털보다 가벼운 건 먼지다. 먼지보다 가벼운 건 바람이다. 바람보다 가벼운 건 여자다. 여자보다 가벼운 건 무(無)다. (알프레드 드 뮈세)

― 20세기인 오늘날 운동을 안 하는 건 가난뱅이 같아서 남 보기에 안 좋다. 운동을 안 하고 있으면 운동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운동을 못하는 것이고, 운동을 할 시간이 없는 것이고, 여유가 없는 것이라는 감정을 받게 된다. 옛날에는 운동하는 사람이 무가의 하인이라며 비웃음을 당했으나, 지금은 운동하지 않는 사람이 열등한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다.

― 셰익스피어도 천년만년 셰익스피어로는 시시하다. 가끔은 사타구니 사이로 햄릿을 보고, 자네 이거 틀렸네 하고 말해 주는 사람이 없다면 문학계도 진보하지 않을 것이다.

― 인간은 오직 복장으로 지탱되고 있는 것이다. (중략) 인간의 역사는 고기의 역사도 아니고, 뼈의 역사도 아니고, 피의 역사도 아니고, 단지 의복의 역사라고 하고 싶을 정도다.

― 자연이 진공(眞空)을 꺼리듯이 인간은 평등을 싫어한다.

― 학자와 작가는 머리를 가장 많이 사용하므로 대개는 가난하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학자와 작가의 머리는 모두 영양 부족이며, 모두 벗겨져 있다.

― 지구가 지축을 회전하는 것은 무슨 작용인지 모르지만,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확실히 돈이다. 

― 서양 문명은 적극적이고 진취적일지는 모르지만 결국은 불만족스럽게 일생을 보내는 사람이 만든 문명일세. 한데 일본 문명은 자기 이외의 상태를 변화시켜 만족을 구하는 게 아니거든. 서양 문명과 크게 다른 점은, 근본적으로 주위의 사정은 바꿀 수 없는 것이라는 일대 가정하에서 발달해 왔다는 것일세. 

― 인간은 자기 자신이 무서운 악당이라는 사실을 골수에 사무치게 느껴 본 사람이 아니면 참으로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 대개 인간의 연구란 자신을 연구하는 것이다. 천지가 됐든, 산천이 됐든, 일월이 됐든, 성신이 됐든 모두 자기의 딴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중략) 더군다나 자신의 연구는 자기 이외에는 아무도 해 주는 자가 없다. 아무리 해 주고 싶어도, 해 주었으면 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호걸은 모두 자력으로 호걸이 되었다.

―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각하는 것만큼 고귀하게 보이는 건 없다.

― 연기가 나면 불이 있음을 알 수 있듯이, 눈이 흐린 것은 어리석음을 증명해 준다.

― 열성은 성공의 정도에 따라 고무되는 법이다.

― 보통 사람은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떠벌이지만, 학자는 알 만한 것을 알기 어렵게 지껄인다. 대학 강의에서도 어려운 말을 지껄이는 사람은 평판이 좋고, 알기 쉽게 설명하는 사람은 인망이 없는 걸 봐도 잘 알 수 있다.

― 마음을 어디에 둘까? 적의 몸의 움직임에 마음을 두면 적의 몸의 움직임에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적의 칼에 마음을 두면 적의 칼에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적을 베려는 데에 마음을 두면 적을 베려는 데에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내 칼에 마음을 두면 내 칼에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적의 칼을 맞지 않으려는 데에 마음을 두면 칼을 맞지 않으려는 데에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남의 태도에 마음을 두면 남의 태도에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어떻든 마음을 둘 곳이 아무 데도 없다는 말이지.

― 억지를 부려 이기면 좋을 것 같지만, 본인의 인물로서의 값어치는 훨씬 더 떨어지게 마련이다. 이상한 것은 고집불통인 본인은 죽도록 자신의 면목을 세웠다고 으쓱댈 뿐, 그때부터 남이 경멸하여 상대해 주지 않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다는 것이다. 행복한 얘기다. 이런 행복을 돼지 팔자 같은 행복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 인간도 대꾸하기 귀찮을 정도로 게을러지면 어딘지 모르게 멋이 풍기지만, 이런 사람치고 여자가 호감을 갖는 예는 없다.

― 배고플 때 신령님 찾고, 가난하면 도둑질하고, 연애하면 편지를 쓰게 된다는 말도 있듯이

― 탐정이란 자들 중에는 고등교육을 받은 놈이 없기 때문에 사실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다 한다. 그자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는 놈들이다. 바라건대 제발 삼가 주었으면 좋겠다. 삼가지 않는다면 사실을 절대로 캐어 내지 못하게 하면 되리라. 들은 바에 의하면, 그자들은 날조된 말로 무고한 양민을 죄인으로 모은 짓까지 한다고 한다. 양민이 돈을 내어 고용해 놓은 자가 고용주를 죄인으로 몰다니, 이 또한 대단한 미치광이다. 

― 인간의 정의를 말할 것 같으면 별다른 것이 없다. 그냥 쓸데없는 것을 만들어서 스스로 괴로워하는 자라고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 그런 불량배에 비하면 주인 같은 사람은 훨씬 고급스러운 인간이라고 해야겠다. 무기력한 점이 고급스러운 것이다. 무능한 점이 고급스러운 것이다. 약아빠지지 않은 점이 고급스러운 것이다. 

― 다수의 힘을 믿고 소란을 피우는 것은 사람들 분위기에 취한 나머지 제정신을 놓아 버리는 것이다.

― 인간이든 동물이든 자신을 아는 것은 생애의 중대한 일이다.

― 관계가 얕은 곳에서는 동점심도 저절로 얕아지는 법이다. 듣도 보도 못한 남을 위해서 눈살을 찌푸리거나, 코를 풀거나, 탄식을 하는 것은 결코 자연스러운 경향이 아니다. 인간이 그렇게 정 많고 사려 깊은 동물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다. 그냥 세상에 태어난 세금으로서 때때로 교제 때문에 눈물을 흘려 보이거나 가여운 얼굴을 지어 보이거나 할 뿐이다.

― 인간의 성질을 바둑돌의 운명으로 추측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인간이란 광활한 세계를 스스로 축소시켜 자기가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자리 바깥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디딜 수 없도록 잔재주를 부려서 자기 영역에 새끼줄을 치는 것을 좋아한다고 단언할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인간이란 고통을 자초하는 존재라고 평해도 좋을 것이다.

― 예술은 인간이 몹시 갈망하는 극치를 표현하는 것.

― 하루 종일 두리번두리번, 살금살금 눈치나 보고 잔재주나 피우면서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잠시도 편할 수 없는 게 현대인들의 마음이야. 문명의 저주가 아니고 뭐겠나? 어리석기 그지없는 노릇이지.

― 옛날 사람은 자신을 잊으라고 가르쳤는데, 지금 사람은 자신을 잊지 말라고 가르치니 전혀 달라. 하루 종일 '나'라는 의식으로 충만해 있거든. 그러니까 하루 종일 평안할 때가 없지.

― 숙고하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지만, 죽을 때는 누구나 번민한다.

― 이 세상에서 그 무엇이 귀하다 해도 사랑과 아름다움만큼 귀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위로하고, 우리를 완전하게 하고,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온전히 이 두 가지입니다. 우리의 정서를 우아하게 하고, 품성을 고결하게 하고, 동정심을 세련되게 하는 것은 온전히 이 두 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세상, 어느 곳에 태어나든 이 두 가지를 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현실 세계에 나타나면 사랑은 부부라는 관계가 되고, 아름다움은 시가와 음악의 형식으로 나누어집니다.

― 인문이 발달한 미래에는 아무도 읽는 사람이 없을 거야. 자네 작품이라서 안 읽는 게 아냐. 사람마다 각각 특별한 개성을 갖고 있으니까 남이 지은 시문 따위엔 도무지 흥미가 없는 거지. 실제로 지금도 영국 같은 데에서는 그런 경향이 확실히 나타나고 있네. 현재 영국 소설가들 중에서 가장 개성이 뚜렷한 작품을 발표하는 메러디스나 제임스를 보라고. 독자가 얼마나 적은가? 적은 게 당연하지. 그런 작품은 그와 같은 개성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읽어도 재미가 없으니 어쩔 수 없지. ... 자네가 쓴 것은 내가 이해를 못 하고, 내가 쓴 것은 자네가 이해를 못 하게 되는 날에는 자네와 나 사이에 예술이고 나발이고 할 게, 뭐, 있겠어?

― 태평하게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속을 두드려 보면 어딘가 슬픈 소리가 난다.

― 나는 죽는다. 죽어서 이 평화를 얻는다. 평화는 죽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나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복되도다, 복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