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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소설 / 희곡 읽기

메타포적 인생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민음사, 2004)안토니오 스카르메타,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민음사, 2004)



“온 세상이 다 무엇인가의 메타포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민음사, 2004)에서 마을 청년 마리오 히메네스가 파블로 네루다에게 묻는다. 작품 배경은 1970년대 초 칠레의 이슬라네그라. 노벨문학상을 받은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1943년부터 정착해 살았고, 현재 그의 무덤이 바다를 바라보는 어촌 마을이다. 마리오는 네루다한테 온 우편물만 배달하는 사람으로 특별 채용된다. 열일곱 살 마리오는 이 일을 계기로 처음으로 네루다의 시집을 읽기 시작한다. 시를 읽으면서, 또 네루다와 대화하면서 청년은 세계를 바라보는 시인의 눈이 독특함을 깨닫고 질문을 던진 것이다.

‘사실대로’ 세계를 보는 것과 ‘제대로’ 세계를 보는 것은 다르다. 비의 물리적 실체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H2O 덩어리다. 그러나 동시에 하늘의 비는 답답한 현실을 씻어 내리는 기쁨이고, 또 억울한 마음이 쏟아지는 슬픔이기도 하다. 

메타포(metaphor)는 희랍어 메타포라(metaphora)에서 온 말이다. 메타(meta-)는 ‘너머로’라는 뜻이고, 포라(phora)는 ‘옮기다’라는 뜻이다. 메타포는 ‘너머로 옮기는 일’이다. 메타포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은 물리적 사실 너머에 있는 것으로 시선을 옮기는 것이다. 

시인은 지금 이곳의 현실을 그 너머의 현실과 겹쳐 봄으로써 이 세계를 변형한다. 이 몸이 병들지 않고 무사히 지내는 한 겹 삶도 감당하기 힘든 시절이다. 그러나 시인은 “사물을 복잡하게 보”는 메타포의 눈으로만 세계를 제대로 볼 수 있고, “우표를 붙이는 데에만 쓰던 혀를/ 다른 데 사용”할 줄 알아야 세계를 잘 표현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메타포가 없다면, 우주에는 아무 뜻도 없다. 물리적 우주는 빅뱅 이후 지금까지 145억 년 동안 지속되는 에너지의 무한한 방출에 불과하다. 원소가 생성되고, 별이 나타나고, 생명이 출현하지만 결국에는 침묵으로 빠져들 우발적 존재일 뿐이다. 인간의 삶 역시 물리적으로는 유전체 복제를 위한 일시적 프로세스 이상은 아니다. 즉, 우주의 실체는 인간과 상관없는 무심한 운동이다. 그러나 무참한 허무가 만물의 운명일지라도, 인간이 지향하는 바는 결코 아니다. 인간의 진짜 삶은 물리적 세계 너머에서 어떻게든 의미의 열매를 맺으려 할 때 시작된다. 

마을 처녀 베아트리스를 보고 한눈에 반한 마리오는, “치료법이 있다 해도 차라리 아프고 말” 병에 걸린다. 사랑에 빠진 마리오는 사실의 언어를 상실해 버린다. 두근대는 심장과 타오르는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유전체 복제 프로세스를 함께 행하지 않을래요?”

왠지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그래서 마리오는 네루다를 찾아와 베아트리스를 위한 사랑시를 써 달라고 부탁한다. “다른 이들은 아무 말도 엮을 줄 모르는 어부들”이고, 네루다만 유일하게 사랑의 언어를 말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의 심장에는 각자 고유한 운율이 필요한 법, 네루다가 마리오 대신 사랑을 표현해 줄 리 없다. 네루다가 시를 써 주지 않자, 마리오는 네루다가 아내 마틸데를 위해 쓴 연애시를 빌려 베아트리스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그가 말하기를…… 제 미소가 얼굴에 나비처럼 번진대요. (중략) 제 웃음이 한 떨기 장미고 영글어 터진 창이고 부서지는 물이래요. 홀연 일어나는 은빛 파도라고도 그랬고요.” 베아트리스의 꿈꾸는 듯한 말로 옮겨진 마리오의 꿀 바른 말들, 이것이 메타포의 언어다. “간덩이까지 시로 변”한 사람만 쓸 수 있는 언어요, “장미와 통닭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할 때 항상 통닭을 집는 사람”은 쓰지 못할 언어다. 

네루다가 깜빡 놓친 부분도 있다. “시는 쓰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사람의 것”이기도 하다. 연인의 미소에서 나비를 보고 터지는 웃음에서 일어나는 은빛 파도를 느끼는 사람이 어찌 시인이 아닐 수 있겠는가. 상황에 맞게 적절히 메타포를 쓸 줄 안다면 누구나 시인일 수 있다. 메타포적 언어를 통해서만 삶은 비로소 행복을 만난다.

“그녀를 뒤에서 껴안는 순간, 잔잔하던 바다에 반짝거리는 고기 떼가 수면 위로 뛰어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형언할 수 없이 거대한 달이 마리오를 환하게 비추었다. 베아트리스 목덜미에 입 맞추는 순간 ‘영원’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키스는 입술 상피세포와 목덜미 상피세포가 닿은 게 아니다. 생명이 약동하고 세계가 환해지며 입술에서 영원이 솟아나는 것으로, 바로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것이다. 마리오의 표현을 빌리면, 삶이란 삼켜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음미하는 것이다. 생각의 침을 섞고 마음의 혀로 굴리면서 스르르 의미가 풀려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메타포는 삶을 음미하며 사는 이들의 언어다. ‘메타포적 삶’을 살아갈 때, 우리 삶은 진실해질 수 있다. 

봄답지 않은 봄이다. 네루다의 시 한 줄로 이 끔찍한 봄을 이기고 싶다. “나는 바란다/ 샘물이 벚나무와 하는 것과 같은 걸 너와 함께 하기를.” 자발적 격리와 사회적 거리 두기의 시절이 그치고, 친밀성 속에서 기꺼이 서로에게 스며드는 사랑의 기적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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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칼럼, 수정하고 덧붙여서 올려 둡니다. 

#readingbook2020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