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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소설 / 희곡 읽기

인간은 무엇으로 변화하는가

세상을 바꾸어 보겠다고, 생활을 바꾸어 주겠다고 소리치는 목소리들이 기세등등하다. 주변에서도 온통 누가 더 잘 할까 이야기로 시끄럽다. 대선 이야기다. 그러나 이들 중 정말 인간이 무엇으로, 어떻게 변화하는지 생각해 본 사람은 드문 듯하다. 

청년 도스토옙스키는 야심만만했다. 스물네 살 때 ‘가난한 사람들’로 데뷔해 ‘고골이 다시 태어났다’라는 칭송을 들으면서 문단에 등장했다. 자신감 넘쳤던 청년은 곧이어 유럽 전역에 몰아닥친 혁명의 물결에 뛰어들었다. 공상적 사회주의자 그룹에 참여해 차르 체제를 비판하고 농노 해방을 꿈꾸다 동료들과 함께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극적 효과를 노린 차르의 정치 쇼에 불과했으나 영문도 모른 채 처형장에 섰던 도스토옙스키는 닥쳐온 죽음의 공포 속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마지막 순간 차르의 자비(?)로 풀려난 그는 곧장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다. 

죽음의 체험에 이은 혹독한 유형 생활은 도스토옙스키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었다. 자전적 소설 ‘죽음의 집의 기록’(열린책들 펴냄)에는 고란치고프라는 인물의 입을 빌려서 그 과정이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죽음의 집, 즉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그는 네 해 동안 발목에 족쇄를 매단 채 밀수꾼, 위폐범, 살인범, 강도 등 극악한 범죄자들과 뒤섞인다. 

좁은 감방에 서른 명이 한데 뒤엉켜 서로 욕하고 조롱하고 비난하는 장면, 사방 열둘 걸음밖에 안 되는 방에 여든 명이 우글대면서 벌거벗고 몸을 씻는 목욕탕 장면, 광기에 사로잡힌 형리들이 무자비하게 채찍을 휘둘러 태형을 가하는 장면 등은 비인간성의 극단을 보여준다. 깨끗하고 우아하게만 살았던 오만한 귀족 청년에겐 속이 뒤집히는 듯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지옥에서 생존하려면 인간도 악마가 될 수밖에 없다. 귀족적 고결함을 버리고 그는 자신을 괴롭히는 동료들의 삶의 방식을 흉내 낸다. 자신이 닮고 싶지 않은 존재를 닮는 전락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한계가 뚜렷하다. 타고난 신분과 삶의 경로가 다르므로 끝내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당신이 어떻게 우리 동료입니까?”라는 솔직한 말을 듣는다. 자신과 하층 민중 사이의 어쩔 수 없는 간극은 그의 내면에 깊은 고독을 불러온다.
민중 닮기를 통해 얻은 것이 없진 않다. 경멸의 마음을 버리고 자신과 민중을 똑같은 존재로 대하면서 도스토옙스키는 인간 모두가 생생한 개성이 있음을 깨닫는다. 인간이란 추상적 한 덩어리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세계였던 것이다. 

주변 인물에 대한 정밀한 관찰을 통해 도스토옙스키는 죄수 각각이 나름의 사연과 독특한 죄의식을 품고 있을 뿐 아니라 극도로 험악한 환경에서도 여전히 소박하고 솔직하며 정의롭고 공정함을 간직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인간은 누구나 벌레이면서 스스로 성인(聖人)이다.

벼락같은 깨달음이었다. 그러니 선민의식에 젖어 민중을 대변하겠다고 설친 자신이 얼마나 우스운가. 이 엄연한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그는 철저한 자기 비판에 나선다. 과거의 자신을 낱낱이 헤집으면서 페테르부르크 문화에 만연했던 서구 추종을 깨끗이 씻어내고,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 러시아적 영성에 대한 믿음, 복잡한 인간 심리의 관찰자로 거듭난다. 

죽음의 체험, 극한의 억압, 자유의 갈망, 밑바닥 생활, 내적 비판 등을 뭉쳐서 자신을 완벽하게 변화시킨 것이다. 지식인 같은 먹물들은 이처럼 산 채로 죽음을 겪는 듯한 고통의 경험과 함께 철저한 자기 비판을 통해 삶을 통째로 바꿀 수 있다.

하층 민중은 변화 경로가 다르다. 이런 사람들은 외부의 계몽을 통해서는 변화하지 않는다. 지식인이 아무리 다가가려 해도 끝내 이들의 동료가 될 수 없고, 결국 끼어 주지도 않는다. 

게다가 이들 안에는 사랑, 우정, 공정, 정의 같은 중요한 인간적 가치들이 이미 단단한 형태로 존재한다. 힘겨운 삶의 조건이 가리고 있을 뿐, 이른바 현인들이 오히려 이들에게 배워야 할 지경이다. 

민중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연극 등을 통한 강렬한 자유의 경험이다. 비통하게 고통받는 그들은 기쁨의 체험을 통해 스스로 각성한다. 죄수들이 성탄절 공연을 마치고 만족해서 잠드는 장면은 작품의 한 절정에 해당한다. 

시베리아에서는 워낙 드문 구경거리라 이들의 공연을 보려고 죄수들은 물론 수용소 바깥 마을 사람들까지 몰려든다.

비참하게만 살아온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연극을 공연하면서 자기 재능을 발휘하고, 사람들 주목과 박수를 받는다. 단 한 차례도 인정받지 못한 삶이 생전 처음으로 자기 가치를 발견한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말한다. “얼마나 많은 재능과 실력이 러시아에서 가끔은 아무런 쓸모없이 부자유와 힘겨운 운명 속에서 파멸해 가고 있는가.”

우리 사회도 다르지 않을 터이다. 심각한 양극화에 절망한 서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시혜를 베풀겠다는 어쭙잖은 선민의식과 사다리 걷어차기가 아니라 감옥을 무대로 바꾸어 누구나 재능을 펼칠 수 있도록 해주는 기회의 장이리라. 

누가 그 일을 할까. 누가 한번이라도 그 일을 진심으로 고민해 봤을까. 다가오는 선거에서 표를 던지기 전에 반드시 물어야 할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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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 칼럼입니다.

살짝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