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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가 죽었다고? 고품질 독립잡지는 순항 중


《중앙일보》 출판면에 기고한 글입니다. 최근 몇 해 동안 서서히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는 ‘고품질 독립잡지’의 유행을 다루어 보았습니다. 조금 보충해서 올려둡니다.  



잡지가 죽었다고? 고품질 독립잡지는 순항 중


《여성중앙》이 무기한 휴간에 들어갔다. 1970년에 창간돼 전성기 때 10만 부까지 찍었던 잡지다. 낯선 소식은 아니지만 거함이 침몰한 기분이다. ‘종이잡지의 대멸종’ 시대일까. 스마트폰 소행성이 콘텐츠 지구에 떨어진 이후, 번성하던 공룡들이 비틀거리는 중이다. 

한국언론재단의 ‘2015 잡지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잡지 등 정기간행물 산업의 매출액은 2012년도부터 하락하기 시작했다. 스마트폰 보급이 일상화된 시기다. 2014년에는 매출액이 1조 375억 원이었는데, 이는 두 해 전에 비해 약 26.2% 줄어들었다. 너무나 빠르게 몰락하는 중이다. 그후로도 폐간 소식이 이어지는 걸 보면, 어려움이 해소된 기미가 전혀 없다. 주변에서 흔히 잡지를 접할 수 있던 미용실, 병원, 은행, 관공서, 카페 등을 가보면 한눈에 이유를 안다. 모두 스마트폰에 코 박고 있다. 이 상황에서 주로 광고를 받아 인건비와 제작비를 충당하면서 일시에 수만 또는 수십만 부를 발행해서 잡지를 운영하는 모델은 지속될 수 없다.

일상의 철학잡지 《뉴필로소퍼》

공룡이 사라진 대지에서 기이한 움직임도 감지된다. 독자들 눈길을 끌고 사랑도 받는 잡지들이 한쪽에서 늘어나는 중이다. 사진을 중심으로 현대문화 전반에 대한 성찰적 비평을 담아내는 《보스토크》, 실제로 지은 집을 두고 건축적 아이디어와 일상의 삶을 동시에 즐길 수 있도록 해주는 《매거진브리크》, 도시 하나를 선정해 일상적 삶을 세부까지 소개함으로써 지속 가능한 삶을 탐구하는 《나우매거진》, 일상의 삶에 인문적 깊이를 부여하는 철학 잡지 《뉴필로소퍼》, 카메라 키트 등을 어른들이 직접 손으로 조립하면서 과학을 학습하는 《메이커스: 어른의 과학》이 선보였다. 

새로운 느낌의 라이프스타일 잡지들도 폭발 중이다. 불안정한 시대에 가족을 삶의 중심에 놓고 살아가려는 ‘대담한 아버지’들을 위한 《볼드저널》, 여성적 삶의 가치에 대한 생각을 개성적 일러스트와 함께 제시하는 《우먼카인드》, 창작자들의 라이프스타일을 통해 도시문화의 첨단을 기록하는 《어반라이프》, 지친 마음에 휴식을 주는 청신한 콘텐츠를 주변에서 발견해 제시하는 《어라운드》, 행복하게 일하는 사람들을 소개하는 《베어》, 동네사람들과 함께 소박하게 식사를 즐기면서 서로 이야기하는 삶을 다룬 힙스터 잡지 《킨포크》 등이 여기에 속한다. 자연의 존재감을 확연히 느낄 수 있는 잘 만들어진 아날로그 물건들에 집중하고, 이 물건들처럼 단순하고 소박한 삶의 풍격을 전달하는 이 잡지들은 지친 현대인에게 ‘또 다른 삶’의 존재를 체험시켜 준다.

포유류처럼 몸집이 크지 않은 탓인지, 새 잡지들은 광고가 증발한 새로운 환경에서도 잘 적응 중이다. 2011년에 창간된 브랜드 전문 다큐멘터리 잡지 《매거진 B》가 중요한 상징일 수 있다. 광고가 전혀 없는 이 잡지는 무인양품, 몰스킨, 레고 등 세계 최고의 브랜드들을 입체적으로 취재한 깊이 있는 콘텐츠, 몇 번을 읽어도 질리지 않는 세련된 디자인, 책장을 넘길 때마다 손에 닿는 고급 종이의 느낌까지 살렸다. ‘무료로 읽고 버리는 잡지’에서 ‘일부러 사서 읽고 서가에 보관하는 잡지’라는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냈다. 

가족을 삶의 중심에 놓고 살아가려는 ‘대담한 아버지’들을 위한 《볼드저널》

정체성과 독자는 각각 다르지만 이 잡지들을 ‘독립잡지’로 불러도 좋을 것 같다. 독립잡지는 주로 개인이 스스로 힘으로 만들고 소량으로 인쇄해 알음알음으로 판매하는 소규모 잡지를 뜻한다. 하지만 전국 독립서점에서 흔히 보이는 자기표현에 중심을 두는 아마추어적 독립잡지와는 시각적으로 달라 보여도, 일정한 수준의 상업적 판매를 목표로 장인적 편집력을 투여해 만드는 이 잡지들 역시 ‘독립잡지’로 분류할 수 있다. 굳이 차이를 두겠다면, 해외에서 자주 쓰는 말대로, ‘고품질 독립잡지’(High Quality Independent Magazine)라고 불러도 좋다.

‘독립’이라는 말을 붙인 것은, 이들이 주류잡지와 차별화되는 독립적 시선에 가치를 둔다는 뜻이다. 또 다른 의미로는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을 말한다. 이 잡지들은 광고를 받지 않는 경우가 많다. 광고주 요구에 맞추어 억지로 꾸리는 ‘기사여? 광고여?’ 콘텐츠를 이들은 지양한다. 소수의 사람들이 흥미를 집중하는 세상의 니치를 탐험하고 싶은 열정으로부터 이들은 잡지를 시작한다. 불특정 다수의 대중을 겨냥하지 않고, 자기 관심에 집중하는 소규모 독자들에게 헌신한다. 

이들은 잡지가 진짜 독자한테 팔리고 실제 읽히기를 바라며 광고가 아니라 판매를 통해 잡지를 꾸리고 싶어 한다. 라이프스타일 잡지를 제외하면, 1만 5000원 이상인 경우가 많다. 조금 비싸나 취지에 공감한 독자들이 지갑을 기꺼이 여는 편이다. 정기구독도 적지 않지만, 주로 서점을 통해 팔리며 입소문으로 독자를 늘려 간다. 콘텐츠 중심의 잡지이기에 과월호가 뒤늦게 판매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이 모든 것이 기존 잡지의 문법과는 차별화된다.

글로벌 비즈니스 노마드들을 위한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모노클》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미국, 영국, 호주, 네덜란드 등도 마찬가지이다. 광고에 의존하지 않고 콘텐츠의 힘으로 틈새시장 독자들의 열정에 호응해서 발행되는 잡지들이 벌써 10여 년 전부터 인기를 끌었다. 가령, 2008년 전 세계가 금융 위기에 빠지면서 광고를 얻지 못한 잡지들의 폐간이 이어지기 한 해 전에 《모노클》이 창간되었다. 《모노클》은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면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비즈니스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위한 라이프 스타일 잡지다.

타일러 브륄레 대표에 따르면, 《모노클》이 추구하는 것은 “넘겨 읽는 손맛이 느껴지고, 재미있고, 수집할 만한 가치가 있는 매체”다. 이 때문에 그들은 콘텐츠를 온라인으로 제공하지 않는다. 종이로만 제작해 런던, 뉴욕, 도쿄, 파리 등의 서점과 전 세계 허브 공항에서 판매한다. 세상에서 가장 바쁜 독자를 위해 이들은 고급 비즈니스 정보와 함께 이들이 엄선한 우아하고 세련된 물건들을 추천한다. 종이잡지의 지속적 위기에도 이들은 해마다 7%씩 판매량이 늘어나는 중이다.

《모노클》만은 아니다. 한국계인 로사 박이 만든, 낯선 도시 속의 행복한 일상을 체험시켜 주는 《시리얼》(2013)도 별다른 광고 없이 호마다 2만 부 이상 판매되면서 주목을 받고 있다. 글로벌 음식문화 잡지 《럭키피치》(2011), 커피와 여행을 하나로 엮은 《드리프트》(2015) 등도 잇따라 창간되어 인기를 끌었다. 

잡지의 주요 독자는 30대들이다. 때때로 20대들도 열광을 보인다. 이 잡지들이 2008년 전 세계 금융 위기 이후, 주로 창간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건과 함께 빚더미에 올라앉은 채로 흥청망청 살아갔던 기성의 대량소비사회는 완벽하게 파산했다. 따라서 이를 대체하는 새로운 윤리가 마련되어야 했다. ‘독립잡지’들은 라이프 전반을 혁명하는 시대의 과제에 응답한 결과이며, 이러한 트렌드가 결국 국내에까지 이어진 것이다.

낯선 도시 속의 행복한 일상을 체험시켜 주는 《시리얼》(출처 :시리얼 홈페이지)

고품질 독립잡지들은 새로운 삶의 감각을 일상에서 실현하는 데 집중한다. 만나고 대화하고 느끼고 즐기는 인생 자체에 깊이와 높이를 부여하고 싶어 한다. 우리를 헛된 욕망에 빠뜨리는 광고들, 떠들썩하지만 흔해빠진 장소들, 셀러브리티의 이미지들에는 무관심하다. 일중독에 빠져 행복을 잃어버린 삶의 균형을 되찾아서, 지루하고 무의미하고 기운을 빼앗는 일상의 흐름을 어떻게든 바꾸는 데 관심을 둔다.

불필요한 출세 욕구에 사로잡히고 쓸데없이 많은 물건에 주목하도록 하는 낡은 잡지 문화는 이미 황혼기에 접어들었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문화의 부활을 조명한 베스트셀러 『아날로그의 반격』에 따르면, “독자가 잡지를 끝까지 읽고 나서 느끼는” 만족감, 즉 ‘인생이 고양되는 느낌’을 주는 잡지들을 독자는 원한다. 한 페이지도 버릴 곳이 없는 ‘완독성’이야말로 이 시대의 잡지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가치다. 순간에서 영원으로, 표면에서 깊이로 향하는, 지금 이대로의 공허한 삶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을 갈망하는 마음이 ‘독립잡지’의 융성에 반영되어 있다. “기존의 잡지들이 빠르게 변화하는 세태와 유행 위주의 이야기를 다루어 왔다면, [이 잡지는] 변하지 않는 것들을 이야기하고 싶어 합니다.” 인터넷에 올라온 한 블로거의 글이다. 그렇다. 한 번뿐인 인생에서 우리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가치를 간직할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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