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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책 읽기

오리엔트 1만 2000년, 그 장대한 역사

우리는 인류의 역사를 동양과 서양으로 나눠 이해하고, 특히 서양 문명 중심으로 서사화하는 데 익숙하다. 그러나 인류의 실제 발자취를 돌이켜볼 때, 동서양 중간에는 중양(中洋), 즉 오리엔트가 있어서 인류 문명의 토대를 놓고 동서양을 연결하면서 언제나 역사의 주역으로 활약해 왔다.

인류의 뿌리 문명에 속하는 이집트·메소포타미아·인더스 문명이 모두 오리엔트 땅에 속해 수천 년간 서로 교류하며 영향을 주고받았고, 인류 정신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가 이곳에서 발원했다. 오리엔트를 알아야 역사를 더 잘 알 수 있다.

이희수의 『인류본사(人類本史)』(휴머니스트, 2022)는 오리엔트를 의도적으로 배제했던 서양 중심의 인류사에 도전해 오리엔트의 역사를 포함하는 본래의 인류사를 보여주겠다는 포부를 담고 있다. 이 책은 오리엔트를 중심으로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에 이르는 세 대륙 역사를 바빌로니아에서 무굴에 이르는 열다섯 오리엔트 제국의 흥망성쇠와 함께 생생하게 되살린다.

약 1만 2000년 전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상류의 아나톨리아에서 문명의 새벽이 열렸다. 인류 최초의 도시 괴베클리 테페가 건설된 것이다. 이 신전 도시는 농경이 아니라 종교가 문명의 원천임을 보여준다. 농사를 지으려고 모여서 도시를 이룩한 것이 아니라 신을 숭배하려고 모여든 사람들이 농사도 지었다.

이후, 9000년 전 오리엔트인들은 최초의 계획도시 차탈회위크를 건설했다. 모든 사람이 같은 크기의 집에 살았던 이 도시는 권력도, 빈부도 없었던 평등한 시민의 공동체였다.

인류는 아나톨리아고원에서 오랫동안 문명을 실험하고,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메소포타미아 평원 등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아나톨리아 문명을 살피면 후대의 이집트, 인더스,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약 5500년 전 메소포타미아에서 역사의 아침이 시작됐다. 수메르인들이 벽돌로 성을 쌓고 관개시설을 구축해서 최초로 도시국가를 건설했다. 신화·문자·법률·행정이 모두 수메르에서 태어났다. 그 뒤를 이은 아카드와 바빌로니아는 사방을 정벌하고 주변 여러 민족을 정복해서 최초의 광대한 통일왕국을 건설했다.

아나톨리아에는 희랍 원정군과 맞서 싸운 트로이, 수메르의 계승자인 아시리아, 이집트와 최초로 두 문명이 충돌하는 세계대전을 벌이고 인류 최초의 성문 평화 조약을 맺은 철기 제국 히타이트, ‘미다스의 손’을 신화로 남긴 풍요의 제국 프리기아 등이 자리 잡아서 천 년의 번영을 누렸다.

쇠로 만든 무기를 들고 도구를 마련해 문명의 질서를 바꾼 히타이트는 왕과 제사장과 귀족원이 상호 견제하는 권력 분립의 기초를 놓았고,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을 이어받아 법치의 개념을 구체화했다. 이집트와 맺은 카데시 평화 조약에는 인도주의적 원칙이 처음 표현되었다.

아나톨리아는 인류사 내내 문명의 요람이었다. 동서양이 교차하고 이슬람과 기독교가 공존하는 이 땅은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여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문명의 용광로이자 삶의 도서관”이었다. 인류의 온갖 생활양식·신앙·공동체·제도·과학기술 등이 이 땅에서 실험을 거쳐 발명된 후, 지중해를 통해 그리스·로마로, 유프라테스강을 통해 메소포타미아·아라비아·아프리카로, 실크로드를 통해서 중앙아시아와 동양으로 퍼졌다.

이 책은 이처럼 오리엔트를 역사의 주역으로 되돌려 인류사를 더 넓고 더 심도 있게 조망한다.

다문화정책과 지방분권이란 관용의 거버넌스로 최초의 대제국을 건설한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로마의 동진을 저지하고 실크로드 중계무역을 장악해 번영을 누린 파르티아, 페르시아 문명의 마지막 계승자 사산조 페르시아의 역사를 살려내 그 적수였던 그리스·로마 제국·동로마 제국의 역사와 함께 균형 있게 서술한다. 그 덕분에 우리는 기원 전후의 1000년 동안 오리엔트를 중심으로 펼쳐진 고대사의 장대한 드라마를 일목요연하게 머릿속에 그려낼 수 있게 되었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는 제국 통치의 기초를 놓았다. 피정복 국가인 메디아의 인재들을 발탁해서 등용하고 유대인을 해방해서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등 관용 정책을 펼치고, 페르시아어뿐 아니라 엘람어, 바빌로니아어를 공용어로 채택하고, 다른 민족으로 종교를 인정했으며, 복속한 지역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등 고도의 통치술을 선보였다. 이러한 관용의 통치술은 후대의 이슬람 제국에 이어졌다.

7세기 이슬람 등장과 함께 아랍 민족이 오리엔트의 주역이 되고, 오리엔트의 태양이 하늘 높이 걸린다. 압바스 제국은 이슬람을 세계 종교로 확산하고, 고도의 학문체계와 과학기술 문명을 이룩했으며, 피정복민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최소화함으로써 이슬람 황금기를 이룩했다. 압바스의 성취 없이는 르네상스도, 근대 과학 혁명도 불가능했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북쪽 초원지대에서 내려와 오리엔트의 지배자가 된 셀주크튀르크는 십자군을 무찌르고 예루살렘을 수복한 후 기독교도에 이슬람 특유의 관용을 베풀었고, 오스만튀르크는 발칸반도를 포함한 남동부 유럽, 오리엔트,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세 대륙의 땅을 거느린 대제국을 무려 500년 동안 운영했다.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은 동서양 교류사의 주역인 중앙아시아의 호라즘샤와 티무르, 이베리아반도의 나스르, 이란의 사파비, 인도의 무굴, 아프리카의 말리와 송가이 등의 역사를 자세히 소개한 점에 있다.

티무르 제국은 중앙아시아 토착 문화에 페르시아, 이슬람 문화를 융합해 고도의 문화적 성취를 뽐냈고, 나스르 제국은 이슬람 문명의 학문적 정수를 유럽에 전했으며, 말리와 송가이 제국은 중세 아프리카 르네상스의 주역이었다. 국내 학자가 이만한 시야로 유라시아-아프리카 대륙 전체의 역사를 하나의 흐름으로 통찰한 경우는 흔하지 않다.

물질 자본주의와 서양 중심주의가 횡행한 지난 200년을 제외하고 오리엔트는 늘 인류 역사의 엔진이었다. 바빌로니아에서 오스만 제국까지 오리엔트 제국들은 동서양의 여러 제국과 쟁투, 교류를 거듭하면서 역사를 이끌었다.

오리엔트가 없다면 진정한 인류사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학문의 힘으로 이만큼 균형 잡힌 인류사가 탄생하는 장면을 보는 것은 무척 뿌듯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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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서평입니다.

말리의 역사는 프랑수아자비에 포벨의 『황금 코뿔소의 비밀』(눌민, 2019)에서 접한 적이 있는데, 송가이 이야기는 처음 자세히 읽었습니다.

빅히스토리 시대에 우리 손으로 쓴 인류(문명)의 역사입니다.

재밌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