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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책 읽기

한국 능력주의의 역사적 기원


황경문 호주국립대 교수의 『출생을 넘어서』(백광열 옮김, 너머북스, 2022)가 출간되었다. 이 책의 주장은 상당히 논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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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 의식은 현대 한국을 특징짓는 주요 요소이다. 고도로 근대화, 산업화한 나라 중에서 한국만큼 학력, 집안, 지역을 따지는 나라는 드물다.


높은 신분 의식과 고위 관료(명문대, 대기업, 언론사 등)를 향한 욕망은 한국 근대화의 고유한 특징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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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대화는 제2신분집단, 즉 서얼, 중인, 무반, 향리, 서북 출신의 신분 변동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신분을 향한 현대 한국인의 끝 모를 갈망에는 이들의 욕망이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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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내내, 이들은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절대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없는 조선 특유의 관료제를 통해 억압당했다.


조선의 신분 질서, 즉 사회 위계는 관료제를 통해 사회의 모세혈관까지 뻗어 나갔다. 양반-중인-평민-천민으로 이루어진 신분 질서는 한 개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 관등과 같은 말이었다. 이 말은 곧 관등이 신분이라는 뜻과 같았다.


고위직은 그 자체로 귀족의 상징이었다. 이로써 지위와 신분이 견고하게 결합되어 한국인의 심성에 뿌리 박았다.


제2신분집단은 관료제의 희생자이자 또 혜택자였다. 이들은 고위직에 접근하거나 혼맥을 열 수는 없었으나, 안정적 직장을 대대로 세습하면서 그 혜택도 사뭇 누렸다. 조선 후기에는 조선 최대의 부자도 이들 중 여럿 있었다.


따라서 이들이 바라는 것은 고위직에 진출해 귀족이 되는 것이었지, 신분 제도 자체를 혁파하는 것이 아니었다.


서얼, 중인이 노동자/농민과 손잡고 혁명에 나서는 '임꺽정 시나리오'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 제2신분집단 대다수의 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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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강제 개항 이후, 제2신분집단이 고위직에 접근할 길이 열렸다. 통리기무아문 산하의 외무아문과 별도로 설치된 근대 군대가 그 통로가 되었다.


윤치호, 유길준 같은 중인과 서얼, 몰락 양반 등은 외무아문 등 외교를 출세의 통로로 삼았고, 조희문, 이진호 등 무반들은 군대를 디딤돌로 삼았다.


원주 변씨, 정읍 이씨, 온양 정씨, 천녕 현씨, 철원 최씨 등 저명한 중인 집안과 평양 조씨, 전의 이씨 등 무반 집안이 앞장섰다. 이들은 일제 이전에는 개화파의 한 축이었고, 일본 망명객과 유학생을 이루었다.


이들의 변신은 재빨랐다. 일제 강점 초엔 조선인 고위직 대부분을 이들 출신이 장악할 정도였다. 1920년대 이후에는 고시를 통해 고위 관료가 되기도 하고, 지방 공무원, 경찰 등의 다수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들의 관심사는 오직 출세와 영달이었다. 출생을 넘어 능력에 바탕을 두고 고위직에 오르는 것이었다. 높은 신분만 얻을 수 있다면 일제에 대한 협력조차 아무 문제 삼지 않을 정도였다.


(500년 동안 억압당한 설움을 풀고 생활을 잘 꾸리는 일이 민족주의보다 우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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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지역 차별을 오래 받았던 서북 지방 출신의 역할은 남달랐다.


이들은 평양을 중심으로 빠르게 근대 지식을 수용했고, 상공업에 바탕을 둔 든든한 경제 기반이 있었으며, 조선 후기엔 과거 급제자를 다수 배출할 만큼 실력도 있었다.


안창호, 조만식, 이동휘, 이승만, 박은식, 이승훈, 이광수, 김소월, 백인제 등 서북 출신들은 근대화를 이끈 큰 인물들로 주목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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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 시험 제도의 변화를 통한 고위직의 개방, 이것이 다른 모든 근대적 변화에 선행한다. 제2신분집단이 이를 주도했고, 근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나머지 사회 변화는 이후에 나타났다.


사람들은 미칠듯이 신분 상승 열망에 불타올랐고, 능력만 있으면 누구나 귀족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얻었다. 이것이 한국적 능력주의의 기원이다. 한국은 능력이 신분(나리/영감)을 낳는 나라이고, 이것이 가능하(다고 믿)기에 놀라운 역동성을 이루어 냈다.


제2신분집단이 앞서 나갔다. 이들은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 때 새로운 귀족 자리에 올랐고, 오늘날 한국 특권층의 뿌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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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제2신분집단 출신은 대부분 상층 귀족에 올라서려 했을 뿐 신분 자체에 대한 성찰은 모자랐다. 고위직에 올라서 명예를 얻은 후에는 오히려 엘리트주의를 강화하려 했다.


그 때문에 한국에서 지위 의식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들은 양반이 되고 싶었을 뿐 양반을 부정하진 않은 셈이다. 핏줄 대신 능력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게 전부다.


‘수험 엘리트’와 '능력주의'로 압축되는 현대 한국의 강렬한 지위 추구 욕망은 이들의 유산이다.


우리는 출생은 넘어섰으나 신분 의식은 아직 극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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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공부로 신분을 획득할 수 있는 나라에 살아간다(라고 믿는다/믿어왔다). 능력주의는 이대남의 한 특성이 아니라 우리 모두, 즉 근대 한국의 특성이다.


한국 사회에서 (능력으로 얻어낸) 신분은 사회적 특권, 경제적 기회, 정치 권력 획득에 실제 영향을 끼치는 한편, 강자가 약자를 차별하고 부자가 빈자를 멸시하며 남성이 여성을 비하하는 뒤틀린 위계를 퍼뜨린다.


게다가 최근에는 출생을 되돌리려는 천박함이 사회 전반에 확산 중이다. 기업은 말할 것도 없고, 외교는 다시 세습 놀음으로 돌아갔고, 사법도 특권층 놀음에 가까워지고 있다.


남은 게 공무원밖에 없어서 개천의 미꾸라지들은 거기에 목을 맨다. 하지만 권 모라는 자는 그 절박한 심정 따위는 아랑곳없다. 분노할 일이다.


어쨌든 이 책은 한국의 근대화를 이룩한 동력이 관료제, 즉 시험을 통한 신분 상승 욕망이라고 본다.


경제의 힘을 부인하지는 않으나, 그 경제 변화를 추동하는 주체적 동기로 교육 등에 의한 인생 역전주의(즉 능력주의)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신분은 해체되지 않았고, 내가 귀족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전도된 욕망만이 들끓을 뿐이다. 그 욕망이 우리를 역사상 가장 부강한 나라로 만들었으나, 동시에 공동체 의식 없는 텅 빈 사회로도 이끌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책은 우리에게 사실상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ps.


읽으면서 제2신분집단이라는 저자의 입론은 어쩐지 러시아 인텔리겐치아, 즉 작은 인간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중인, 서얼 등의 신분 변동의 의미에 대해서는 기존 학계 쪽에서 격렬한 반박이 있을 것도 같다.

 
황경문, 『출생을 넘어서』, 백광열 옮김(너머북스,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