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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소설 / 희곡 읽기

테드 창, 과학의 문으로 들어가 철학의 출구로 나오다

모든 SF는 잠정적으로 반체제 소설이다 

테드 창(1967~   , 출처: 위키미디어)테드 창(1967~ , 출처: 위키미디어)


테드 창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2000년대 초 《Happy SF》의 작가 특집을 통해서다. 이 작가는 중단편 8편으로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함께 받았다. SF를 즐기지는 않지만, 두 상을 동시에 받은 이른바 ‘더블 크라운’ 작품이 훌륭하다는 건 안다. 『듄』, 『어둠의 왼손』, 『빼앗긴 자들』, 『뉴로맨서』, 『엔더의 게임』, 『신들의 전쟁』 등이 이 목록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자유의 양식이다. 특정 내용, 문장 스타일, 쓰는 방법 등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소설의 시학은 기성의 규칙이나 굳어진 관습 같은 것을 좀처럼 따르지 않고, 작가가 작품 내부에 이룩된 질서만을 존중한다. 이 때문에 소설은 어떤 이야기도 가능하고, 어떤 스타일도 거부하지 않는다. 작가 임의로 서사의 내적 규칙을 세운 후, 잘 짜인 이야기 속에서 이를 ‘그럴듯하게’ 실현하면 소설이 성립한다. 소설은 ‘후행적’이다. 어느 누구도 작품이 나오기 이전에는 소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SF의 본질은 경이’라든지 ‘소설의 핵심은 문체’라든지 하는 어떠한 선험적 진술도 성립하지 않는다. 좋은 소설은 항상 이러한 비평적 규정을 배반하기 때문이다.

소설은 현실에 대한 훌륭한 ‘사고실험’의 형태를 띤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자유란 주어진 현실 바깥으로 나아가려는 욕망의 운동이다. 이것은 항상 실험의 형태를 띤다. 현실을 극한까지 밀어붙인 후, 그다음을 떠올리고 어떤 상상의 질서를 시도해 보는 것이다. 따라서 소설은 늘 상상을 필요로 하며, 인간은 작품에 실현된 상상의 질서를 통해 자신의 한계를 확장하는 쾌감을 얻는다. 

SF 소설은 상상을 촉진하고 확장하는 데 과학이라는 수단을 쓴다. SF 작가들은 과학 기술에서 사고의 힘을 빌려 현재와 전혀 다른 사회 질서를 구상한다. 현재의 사회 질서 너머에/다음에 올, 또는 전혀 다르게 분기해 존재했거나/존재하거나/존재할 이질적 질서를 창조한다. 따라서 모든 SF는 잠정적으로 반체제 소설이 된다. 현존하는 권력의 질서에서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 ‘다른 세상’을 창조하니까 말이다.

좋은 작품들은 때때로 읽고 나서 질투를 불러일으킨다. 통찰의 예리함, 경험의 놀라움, 언어의 정교함, 설정의 견고함, 지적인 풍부함, 상상력의 기발함 등 이유는 많다. 그런데 테드 창의 작품은 이 모두를 갖춘 듯한 느낌이 든다. 국내에 나온 첫 작품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처음 읽고 난 첫인상은 ‘세상에 이런 인간이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부러워서 미칠 듯한 기분이었다. 지성과 지혜를 함께 갖추기 얼마나 어려운가. 그러나 테드 창의 작품에는 엄밀한 지적 추리와 인생에 대한 성찰이 동시에 있다. 구상성과 현실성을 동시에 얻기는 얼마나 힘든가. 그러나 테드 창의 소설에는 마음껏 떠올리는 힘과 손에 잡힐 듯한 생생함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17년 만에 출간된 두 번째 작품집 『숨』에서도 독창적 천재성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다. 어찌 질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테드 창의 작품은 물리학보다는 인류학에 가깝다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 김상훈 옮김(앨리, 2016).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 김상훈 옮김(앨리, 2016).

책으로 출간된 테드 창의 작품은 『당신 인생의 이야기』와 『숨』 둘뿐이다. 애독자로서 안타까운 일이다. 테드 창은 스물세 살 때인 1990년 「바빌론의 탑」으로 데뷔했다. 중단편소설만 발표하는데, 서른 해 동안 발표한 작품이 고작 열일곱 편이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8편, 『숨』에 9편이 나뉘어 실려 있다. 아쉽게도 장편소설은 아직 없다.

테드 창의 작품은 물리학보다는 인류학에 가깝다. 과학의 논리를 자유자재로 끌어다 쓰기는 하지만, 사실 그의 작품은 고전적이다. 현실 세계와 비슷하지만 규칙이 완전히 다른 거울 세계 속에서 테드 창은 인류가 오랫동안 품어 왔던 심오한 질문들을 물고 늘어진다. 이 때문에 그의 작품들을 읽으면 과학의 문으로 들어섰다 철학의 출구로 나온 듯한 느낌이 든다. SF를 읽는 큰 즐거움 중 하나인 지적 설계로 흥미를 자극하지만, 실제로는 인간 영혼에 대한 심오한 탐구 쪽에 가깝다. 인문학적 SF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진실이란 무엇인가, 기억이란 무엇인가, 언어란 무엇인가, 운명과 자유의 관계는 무엇인가, 미래를 알면 행복해질 수 있는가, 지능이 무한히 높아진 인간은 무엇을 하려 할 것인가 등 인류가 아직 답을 모르지만 도저히 탐구를 그칠 수 없는 묵직한 질문들이 작품마다 담겨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질문 아래에 놓인 진짜 질문은 하나뿐이다. 문학이 지금껏 물어왔으며, 앞으로 영원히 물어볼 궁극적 질문. 

“어떻게 살 것인가?”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삶의 기본 규칙이 바뀌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오더라도 인간은 끝내 이 물음을 잊지 못한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자신 앞에 놓인 세계의 무한한 불확실성 때문에 불안에 떨면서도 자기 존재 의미에 대한 탐구를 멈출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테드 창의 작품이 깊은 여운을 남기는 것은 자연스럽게 독자들을 이 물음 앞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테드 창의 작품들은 SF로 쓰인 일종의 종교다. 두 책에 실린 열일곱 편 모두 훌륭하지만, 임의로 몇 작품을 소개하고 싶다.

「바빌론의 탑」의 화자는 광부다. 성서에 나오듯, 바빌론 사람들은 신들의 영토에 이르는 높은 탑을 쌓았다. 몇 세기에 걸친 작업 끝에 탑이 천국의 바닥에 닿자, 경험 많은 광부를 초대해 천국의 지상에 다다를 때까지 파 올라가도록 한 것이다. 하늘 높은 곳에서 숨을 쉬려면 산소 호흡기가 필요하지 않나 같은 엉뚱한 생각도 들지만, 실감 나는 묘사 덕분에 누구나 금세 몰입해 들어갈 수 있다. 신의 대지 밑바닥에 구멍을 뚫고 올라간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천국은 도대체 어떤 곳일까. 광부가 뚫은 통로는 놀랍게도 바빌론 사막으로 이어져 있다. ‘클라인 씨의 병’처럼 말이다. 바깥으로 나갔다고 여기는 순간, 인간은 다시 안으로 내팽개쳐지는 것이다. 지금 여기 말고 다른 시공간은 없다. 인간은 끝없이 바깥으로 나가려 하지만 실제로는 이 세계에 완벽하게 결박된 존재라면, 우리는 이 아이러니한 비극 속에서 삶의 의미를 다시 따져 묻지 않을 수 없다. 

「네 인생의 이야기」는 외계생명체 언어를 배우는 언어학자 루이즈의 이야기다. 헵타포드라는 외계생명체의 언어는 순차적・인과적인 인간 언어와 달리 세계를 전면적・동시적으로 인식하고 표현한다. 이들의 언어를 배우면서 루이즈는 현재에만 집중하지 않고 인생을 전체로 인지하는 법을 배운다. 마치 인공지능의 언어를 상상해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이 작품의 언어에 대한 아이디어는 뇌 신경세포 재생의 결과 신 같은 지능이 생겨난 천재들의 이야기인 「이해」에서도 비슷하게 재현된다. 현재 속에서 “과거와 미래를 한꺼번에 경험하면, 즉 “세월 전체를 동시에 지각”하면, 인생은 어떻게 될까. 루이즈는 기쁨과 고통이 공존할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딸에게 건넴으로써 그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은 ‘세월의 문’을 둘러싼 이야기다. 이 문을 통하면 20년 전이나 20년 후의 세계로 갈 수 있다. 과거로 돌아가거나 미래를 알면 인생역전이 있을 것 같은 싸구려 회귀물이 범람하는 이 시대에 작가는 우리한테 묻는다. ‘과거로 돌아가면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이 작품은 회귀를 둘러싸고 서로 얽힌 네 가지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과연 인생을 바꾸었을까. 당연히 아니다. 스무 해 전에 일어난 아내의 죽음을 막으려고 과거로 돌아간 화자의 모험은 헛되기만 한 것일까. 역시 아니다. 답이 정해진 상태에서도 기꺼이 분투할 때에만 인간은 삶의 진실을 알 수 있다. 화자는 말한다. “그 무엇도 과거를 지울 수 없습니다. 다만 회개가 있고 용서가 있고 후회가 있습니다. 단지 그뿐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승리가 아니다. 더 마음에 드는 삶이 있을 수 있지만 마음에 안 든다 해서 그 삶이 가짜라고 할 수 없다. 어떤 삶이든 우리가 할 일은 주어진 운명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되, 회개하고 용서하고 후회할 줄 아는 존재가 되는 일이다. 인생의 진실은 이로써 충분하다.

「숨」은 ‘기억이란 무엇인가’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룬다. 크롬 하늘이 덮인 우주에서 살아가는 일종의 기계 생명체인 화자는 자기 해부에 도전함으로써 기억의 실체를 탐구한다. 그 결과, 밝혀진 것은 생명의 원천이 공기가 아니라 기압 차이라는 것이다. 엔트로피 법칙에 따라 지구 에너지의 무질서도가 높아지듯, 이 우주의 공기 역시 점차 평형 상태를 향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고 나면 종의 소멸이 다가오고, 우주 역시 영원한 침묵에 싸일 것이다. 우주의 필멸을 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실, 이것은 우리 자신 앞에 놓인 영원한 질문이다. 화자는 다른 우주에서 온 탐험자를 기다리면서 이야기를 새긴다. “탐험자여, 당신이 이 글을 읽을 무렵 나는 죽은 지 오래겠지만, 나는 당신에게 고별의 말을 남긴다. 당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의 경이로움에 관해 묵상하고, 당신이 그럴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라.” 이야기를 남기는 것이야말로 최후의 날에 우리가 심어야 할 사과나무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는 디지털 애완동물 ‘디지언트’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다. 다마고치를 연상시키는 이 동물은 디지털 어스라는 플랫폼에서 사람들 사랑을 받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열흘 붉은 꽃이 없듯, 어느 날 수익성이 없다는 이유로 플랫폼이 폐쇄될 위기에 처하자 디지언트도 함께 소멸할 위기에 놓인다. 오래된 서버에 유기된 소프트웨어 객체들, 즉 디지언트들의 운명은 신의 애완동물로서 오랫동안 살아오다 기후위기와 함께 위험에 빠진 인간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작가는 이들에게 이번에는 어떤 놀라운 제안을 할 것인가. 

단편의 미학이 지적 반전을 통한 독자의 아이러니 경험에 달려 있다면, 테드 창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높은 성취를 보여 준다. 소설 앞부분에서 독자가 품었던 어설픈 기대가 배반당하지 않는 작품은 드물다. 테드 창은 독자의 기대지평을 세우는 정교한 사고실험을 설계한 후, 어느 한 순간 사건을 반전시켜 독자의 지성을 번번이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번지 점프를 뛴 듯 아찔한 지적 추락 이후에 독자를 찾아오는 것은 현재 우리가 추구하는 삶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다. 테드 창은 말한다. “아무리 오랫동안 여행을 해도 인간은 결국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도록 되어 있다.” 

테드 창의 『숨』, 김상훈 옮김(앨리, 2019)테드 창, 『숨』, 김상훈 옮김(앨리, 2019)



우리가 바라는 것은 결말이 아니라 대화다


우리는 현재의 언어로 이루어진 지금 여기의 세계가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테드 창은 우리에게 또 다른 언어로 이루어진 또 다른 세계가 가능함을 보여 준다. 하지만 어떠한 사고실험 속에서도 삶의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 인간이 아무리 더 많은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이룰 능력이 있더라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질문이 있는 한, 여행은 끝나지 않는다. 또 여행이 있는 한 이야기는 계속된다. 테드 창의 소설 속 화자들은 자신의 운명을 이미 안다. 하지만 이야기를 만드는 여행은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정말로 바라는 것은 결말이 아니라 대화이기 때문이다. 

“벌써 무슨 얘긴지 알고 있는데 왜 나더러 읽어 달라고 하는 거야?” 

“얘기를 듣고 싶으니까!” 


#readingbook2020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