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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걷는 생각

겨울을 맞는 마음

며칠 전, 한밤중에 첫눈이 내렸다. 후배랑 김치전을 곁들여 한잔하는 중에, 어둠 속에서 갑자기 눈송이가 뭉쳤다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바깥으로 슬쩍 나가서 손바닥을 공중으로 내밀자 피부에 닿은 눈이 스르르 방울졌다. 

자연은 쉬지 않는다. 단 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절기를 돌린다. 낳고 또 낳는 변화(易)야말로 세상의 이치다. 엊그제가 가을인 듯싶더니, 어느새 “이슬은 서리로, 비는 눈으로” 바뀌었다. 겨울이 온 것이다. 

때마침 어제(22일)가 소설(小雪)이었다. 눈 내릴 무렵에 적절히 눈이 온 셈이다. 위스춘의 『시간의 서』(강영희 옮김, 양철북, 2019)에 따르면, 소설과 더불어 “만물의 숨결은 흩어지고, 나고 자람은 거의 멎어 겨울이 온다.” 사나흘 전부터 과연 사람들 옷차림이 두꺼워지더니, 올해도 시커먼 패딩을 몸에 두른 ‘김밥족’들이 거리를 덮어 가는 중이다. 


위스춘의 『시간의 서』, 강영희 옮김(양철북, 2019)


그러나 단순히 ‘춥다’ ‘눈 오다’ 같은 물리 현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절기를 제대로 즐기려면, 자연의 내밀한 목소리를 듣는 심리로 도약할 필요가 있다. 소동파는 노래한다. 


연꽃은 이미 져서 비 가릴 덮개조차 없는데(荷盡已無擎雨蓋)/ 국화는 오직 남아 서리 덮인 가지가 꼿꼿하구나.(菊殘猶有傲霜枝) 


누군가는 잎 진 연꽃을 보면서 우울한 무상을 한탄하는데, 누군가는 서리 덮인 국화 가지를 보면서 고고한 아름다움의 볕을 쬔다. 무상도, 고고도 피할 수 없는 심정이지만, 어떤 삶이 우리를 더 가치 있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백거이는 말을 건넨다. 


저녁에 하늘에서 눈 내리려 하거늘(晩來天欲雪)/ 술 한 잔 안 할 수 있겠는가.(能飮一杯無) 


술 한 동이 마련해 친구를 호명함으로써, 눈 오는 밤의 풍광은 고독한 추위가 아니라 정겨운 운치로 승화된다. 두 사람이 담소하는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뜨거워진다. 어떤 상황에서도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법을 아는 사람을 우리는 시인이라고 부른다. 

루쉰의 산문 역시 눈의 미학을 발전시킨다. 


눈 덮인 벌판에 새빨간 동백꽃, 푸른빛 감도는 외겹의 하얀 매화꽃, 경쇄 모양은 황금빛 납매꽃이 있고, 눈 아래에는 푸른빛 잡초도 있다. 


눈이 아름다운 것은 동백, 매화, 납매 같은 꽃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에 완벽한 시련은 없다. 인간은 아무리 힘든 시간 속에서도 크고 작은 꽃을 맺으면서 살아간다. 자연은 인간을 절망시키지 않는다. 쉬지 않고 다시 절기를 돌려 마침내 어느 날에는 지금의 눈 덮인 벌판에서 푸른빛을 겉으로 드러낼 것이다. 눈에서 꽃을 찾고 풀을 보는 이 기개가 우리를 기어이 희망의 존재로 만든다. 

위스춘은 『주역』의 괘를 빌려서 소설(小雪)을 명출지상(明出地上), 즉 “밝은 것이 땅에서 나오는” 시기라고 풀이한다. 


추운 날에 생명은 여전히 자신을 표현하려 애쓰고, 인류는 여전히 건강하고 왕성한 생명력을 드러내며, 군자는 스스로 밝은 덕을 밝힌다. 


스산한 날씨에 굴복해 심신을 움츠리는 대신, 스스로 성찰하고 서로를 돌보는 밝은 마음을 온 세상에 드러낼 시기라는 말이다. 이 마음이 겨울을 맞는 참된 태도요, 어쩌면 입동 다음 소설이 있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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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칼럼입니다. 

살짝 고쳐서 여기에 옮겨 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