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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걷는 생각

아내와 10년 여행을 계획하다

항저우 서호 풍경


요즈음 아내와 나는 들떠 있다. 인생 100년의 절반을 막 지난 아내와 함께 오래전부터 두런두런 이야기해 온 일을 실행에 옮기려 하고 있다. 다리 힘이 더 떨어지고 호기심이 더 줄어들기 전에 앞으로 10년 동안 한 계절에 한 차례씩 중국을 중심으로 아시아 도시 마흔 곳쯤을 골라서 차례로 방문할 생각이다. 주로 주말을 이용해 한 도시에서 사나흘, 또는 휴가를 얻으면 일주일쯤 돌아보려 한다.

버스 타고 몰려다니며 잠깐 유명 관광지를 방문하는 관광 여행은 질색이지만 오랜 검색 끝에 찾아낸 '가성비 맛집'이나 '인스타 골목 명소' 같은 식으로 이른바 '현지인 체험'을 즐길 생각도 없다. 짧은 방문에 현지인 어쩌고는 청춘들이나 행할 일로 치부하는 '솔직한 꼰대'가 되는 쪽을 택하려 한다.

유명 관광지를 깊게 즐기는 것이야말로 가장 현지인답게 여행지를 체험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이름 높은 문화 유적이나 아름다운 풍경, 전통의 거리, 훌륭한 식당 등은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이들이야말로 한 문명의 역사적 정수요, 문화적 자부이며, 인간적 체험의 집약이다. 짧은 여행에서 그곳을 대체하는 것보다 차라리 그곳을 어떻게 잘 경험할지 고민하는 편이 낫다.

짧은 여행일수록 잘하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어디에서 자고, 어떻게 움직이고, 무엇을 먹을까 등을 도와주는 실용적 가이드가 우선이다. 각종 여행서와 구글의 도움을 받아 이 일을 정리한 다음에는 여행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나 회고록을 읽으면서 현지의 삶을 미리 살아볼 필요가 있다. 여행지 사람들이 무엇에 의미를 두고, 어떻게 느끼고 살아가는지를 모르고 여행을 잘하는 건 아무래도 어렵다. 현지의 역사, 사회, 문화를 다룬 책을 읽거나 앞선 방문자들의 여행기를 읽으면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이 중요하다. 잘 고른 책을 열 권에서 스무 권 남짓 읽고 나면 머릿속에 현지에 대한 어떤 그림이 그려진다. 여행이란 사전 공부를 통해 이룩한 기대를 확인하고, 피부에 붙이며, 의외성을 확인할수록 더 좋은 추억을 남기는 것 같다.

최근에는 삶을 아예 여행으로 만들어 버린 사람들, 어느 곳에도 적을 두지 않고 하나의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끝없이 여행하는 '라이프스타일 여행자'도 흔하다는데 솔직히 언감생심이다. 나에게 이 여행은 집을 확인하려고 떠나는 것이다. 아내와 서로의 존재를 사무치게 느끼고, 돌아올 삶의 의미를 풍요롭게 하려는 것이다. 일찍이 호메로스는 위대한 여행자 오디세우스를 찬양하면서 슬쩍 내비쳤다. 여행이란, "부부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금실 좋게 살림을 살 때만큼 강력하고 고귀한 것은 없음"을 아는 일이라고. 주말에 떠날 항저우를 출발로 하는, 앞으로 10년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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