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이 끝나고 근대가 전면적으로 개화하며 전 세계가 미국과 프랑스를 본받아 자유를 원리로 하는 국가, 사회, 제도를 만들기 시작하던 바로 그때, 역설적으로 근대가 힘을 잃고 소모되어 스스로를 감히 ‘보편적’이라고 내세울 수 없음이 분명해졌습니다. 1970년대 말에 일어난 이란혁명은 이 상황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 준 징후였습니다. 중동 지역에 자유를 기본 원리로 삼은 국가가 아니라 ‘이슬람 부흥주의’의 기치를 내건 국가가 등장하면서 중동은 격동의 시대로 빠져들었습니다. (강상중)
강상중, 우치다 다쓰루, 『위험하지 않은 몰락』, 노수경 옮김(사계절,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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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자유로운 개인을 내세우고 정치-경제-종교의 분리를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경제(돈)가 모든 사회 조직을 지배하는 근대라는 게 마르크스의 뛰어난 통찰이다.
레닌이 발명한 소비에트는 국가와 사회를 하나로 묶는 총력전 스타일의 근대였다. 여기에선 정치와 경제와 종교(윤리, 예술 등)가 하나여야 했다. 이때 주도권을 갖는 것이 정치, 즉 당파성이다.
현재로 보아, 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렇다면 ‘돈의 지배’도 아니고, ‘정치의 지배’도 아닌, 또 다른 근대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것이 현대 철학의 깊은 고민인 듯하다. 이를 자기 배려의 근대, 영성의 근대, 윤리의 근대, 타자의 근대, 차이의 근대 등으로 불러도 좋다. (윤리와 정치는 방향만 다를 뿐이니까, 또 다른 정치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푸코는 이란 혁명에서 그 찬란한 현현을 보았다. (당연히 동료들의 비웃음 대상이 되었다.) 자유를 근간으로 하지 않는 근대 또는 포스트 근대는 가능한가. 푸코의 가슴을 채운 것은 아마 이런 질문이 아니었을까. 푸코는 그 답으로 정치적 영성 개념을 꺼내 들고, 그 조건을 탐색하다가 죽었다. 물음을 이어받은 것은 후학들이다. 강민혁의 자기 배려의 정치경제도 같은 맥락에 있다고 본다.
그런데 나만 그렇게 느끼는지 몰라도, 이 움직임은, ‘성(聖)’과 ‘현(賢)’을 겸비할 것을 요구한 공자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더 똑똑해져야 할 뿐만 아니라 자기를 더 좋은 존재로 변형해야 한다. 후자가 아니면 전자는 아무것도 아니다. 서양의 사유가 기어이 동양의 사유와 만난 듯한, 일종의 되먹임 같은 게 느껴지는 것이다.
자기를 바꾸는 실천(자기계발)이 오히려 자신을 아프게 하지 않으려면, 거기에 무언가 영적 차원이 깃들어야 하는 듯하다. (중국식 현능주의도 이런 면에서 들여다볼 필요가....) 아직 충분히 개념화하지는 못했지만, 전 직장을 나온 후 시골 마을에서 머무를 때 나는 이 질문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읽기 중독자로서 남은 생을 이를 둘러싼 논의에 참여하고 대답을 활성화하는 데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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