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임금과 순임금이 천하를 어짊[仁]으로써 이끌자 백성들이 (기꺼이) 그 가르침을 따랐다. 걸임금과 주임금이 천하를 포악함으로써 이끌자 백성들이 (마지못해) 그 가르침을 따랐다. 그 명령하는 바와 그 좋아하는 바가 반대여서는 백성들은 따르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군자는 자기에게 (어짊이) 있은 이후에야 비로소 남한테서도 (그 어짊을) 구하고, 자기에게서 (포악을) 없앤 이후에야 비로소 남한테 (그 포악을) 아니라고 한다. 몸에 간직한 바가 서(恕)가 아니면서 능히 남을 깨우친 사람은 아직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그 집안을 가지런히 하는 데 달려 있는 것이다.
堯舜帥天下以仁, 而民從之. 桀紂帥天下以暴, 而民從之. 其所令反其所好, 而民不從. 是故, 君子有諸己而後求諸人, 無諸己而後非諸人. 所藏乎身不恕而能喩諸人者, 未之有也. 故治國在齊其家.
어제에 이어서 전(傳) 9장을 계속 읽겠습니다. 오늘 읽은 부분에서 가장 눈여겨볼 것은 ‘서(恕)’라는 말입니다. 공자가 증자를 불러서 자신의 도를 하나로 꿴다면 ‘충서(忠恕)’ 두 글자로 압축할 수 있다고 스스로 말한 바 있으므로, 유학의 핵심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자가 말하는 충(忠)은 단지 나라에 충성한다는 뜻을 넘어섭니다. 오히려 마음속 품은 뜻을 한결같이 유지하는 것, 즉 성(誠)에 가까운 말입니다. 서(恕)는 공자 자신의 말처럼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는 뜻입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 즉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희는 이를 추기급물(推己及物), 즉 자기를 미루어서 남에게 미친다고 풀이했습니다. 예수도 이와 비슷한 말(“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신약성서』 마태복음 7장 12절)을 한 것을 보면, 이는 동서고금에 통하는 황금률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밝은 덕[明德]을 자신한테 적용할 때에는 충(忠)해야 하고, 남에게 적용할 때에는 서(恕)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한 문장씩 읽겠습니다.
요순솔천하이인(堯舜帥天下以仁), 이민종지(而民從之). 걸주솔천하이포(桀紂帥天下以暴), 이민종지(而民從之). 기소령반기소호(其所令反其所好), 이민부종(而民不從)
동양에서 요순(堯舜)과 걸주(桀紂)는 각각 성군(聖君)과 폭군(暴君)의 대명사입니다. 『대학』의 저자는 요순이 ‘어진 정치’를 펼쳐 백성을 다스렸다 합니다. 帥은 ‘장수’라는 뜻일 때에는 ‘수’로 읽고, ‘이끌다’라는 뜻일 때에는 ‘솔’로 읽습니다. 여기에서는 동사로 쓰였으므로 ‘이끌다’ ‘거느리다’로 새겨야 합니다. ‘종(從)’은 흔히 요순을 좇아 ‘백성의 성품이 함께 어질어졌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이때에는 ‘따라하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김용옥은 ‘종’을 ‘명령에 복종하다’라는 뜻으로 새길 때 의미가 더욱 풍부해진다고 말합니다. 사실 저는 예전부터 이 구절을 읽을 때 지도자가 포악하다고 해서 과연 백성까지 포악해진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가에 의심을 품었습니다. 그런 세상은 생지옥이어서 진정으로 어떤 혁명도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김용옥은 “인자하거나 난폭하거나를 막론하고 군주의 정령(政令)은 일단 따를 수밖에 없다. 난폭해도 거기에는 최소한 거짓이나 위선은 없기 때문”이라고 이 구절을 풀이합니다. 이렇게 보면 걸주의 문제는 포악으로써 천하를 이끌었다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은 포악으로써 백성을 대했으면서 백성에게는 충성을 요구했다는 데 있습니다. 속에 있는 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겉과 속이 결국에는 달라졌으므로 백성들이 끝내 그들을 버리고 탕왕과 무왕을 좇아 새로운 왕조를 개벽한 것입니다. 이어지는 문장, 즉 군주가 명령하는 바가 그 좋아하는 바와 상반되어서는 백성들이 그 가르침을 좇지 않는다는 말은 이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먼저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마음을 바루어서 몸을 맑게 한 이후에야 비로소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 나라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이를 ‘솔선수범(率先垂範)’이라고 합니다. ‘포(暴)’는 ‘폭(暴)’이라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이때에는 ‘폭력’ ‘폭정’이라고 새기면 됩니다.
시고(是故), 군자유제기이후구제인(君子有諸己而後求諸人), 무제기이후비제인(無諸己而後非諸人).
시고(是故)는 ‘이런 이유로’라고 풀이합니다. 제(諸)는 흔히 ‘모든’ ‘여러’ 등의 뜻이지만, 여기에서는 어조사로 ‘~에’라는 뜻으로 ‘어(於)’와 같습니다. ‘무(無)’는 단순히 ‘없다’라기보다 ‘없애다’로 풀이하는 게 좋습니다. ‘인(人)’은 여기에서는 ‘남’이라는 뜻입니다. ‘비(非)’는 ‘아니다’ ‘비판하다’ ‘그르다고 말하다’ 정도로 새깁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군자는 자기에게 있은 이후에야 남에게서 구하며, 자기에게서 없앤 이후에야 남에게 아니라고 한다.”라고 해석하면 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있고, 무엇을 없애야 한다는 걸까요? 유(有)와 무(無)의 대상이 빠져 있으므로 새기면서 보충해야 하는데, 앞 문장에서 이어지는 바에 따르면 나한테 있어야 하는 것은 ‘인(仁)’이고, 나한테서 없애야 하는 것은 ‘포(暴)’입니다. 나한테서 어짊이 있고서야 남한테서도 어질게 살라고 할 수 있는 것이고, 나한테서 포악함을 없앤 이후에야 남한테서도 포악을 부리지 말라고 할 수 있는 법입니다. 주희는 있을 바와 없앨 바를 각각 ‘선함’과 ‘악함’으로 풀었습니다.
소장호신불서이능유제인자(所藏乎身不恕而能喩諸人者), 미지유야(未之有也).
‘장(藏)’은 ‘간직하다’ ‘저장하다’는 뜻입니다. ‘호(乎)’는 ‘어(於)’, 즉 ‘~에’라는 뜻입니다. ‘신(身)’은 몸이라고 쓰였지만, 『대학』은 몸과 마음을 하나로 보므로 마음으로 새겨도 됩니다. ‘서(恕)’는 『논어』에서 유래했습니다. 『논어』에 ‘서’가 언급된 곳은 두 부분입니다. 하나는 「이인(而仁)」 편에 나옵니다. 공자가 증자에게 말합니다. “삼아, 내 도는 하나로 꿰어지느니라(參乎, 吾道一以貫之).” 그러자 증자가 즉시 답합니다. “알겠습니다(唯).” 스승은 도를 전하고, 제자는 더 이상 묻지 않고서도 알아들었으니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이 선문답에 다른 제자들은 그 속뜻을 궁금해 합니다. 그래서 공자가 바깥으로 나가자마자 증자에게 달려들어 무슨 뜻인지를 묻습니다. 그러자 증자가 자신이 이해한 바를 이야기합니다. “선생님의 도는 충서(忠恕)일 뿐이다(夫子之道, 忠恕而已矣).” 만사를 꿰뚫는 하나의 도리는 ‘인(仁)’이고, 충(忠)과 서(恕)는 인을 실천할 때 지켜야 할 준칙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충은 『논어』에서 성(誠)과 비슷한 개념으로 흔히 쓰이는데, 자신을 위해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한결같이 정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서는 자신의 도를 남한테 적용할 때 지키는 도리인데, 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때 내 마음에 견주어 살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선 「위령공」 편에 그 뜻이 자세히 나옵니다. 자공이 공자에게 묻습니다. “선생님, 죽을 때까지 행할 만한 것을 한마디로 한다면 무엇일까요(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 이에 공자가 답합니다. “서(恕)일 거야. 자기가 바라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않는 거지(其恕乎. 己所不欲, 勿施於人).” 답을 보면, 서란 어디까지나 밝은 덕을 세상에 실천할 때 적용할 도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유(喩)는 효(曉), 즉 밝히 깨우쳐 준다는 뜻입니다. 제(諸)는 ‘~에’라는 뜻입니다. 제인(諸人)은 ‘남의 잘못에 대하여’ 정도로 새길 수 있습니다. 미지유야(未之有也)는 앞에서도 여러 번 나왔습니다. ‘아직 있지 않았다’라는 뜻입니다.
고치국재제기가(故治國在齊其家)
고(故)는 결과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라는 뜻입니다. 먼저 자신을 충실히 하고, 자신이 바라는 바대로 남을 대해야 비로소 백성들이 따를 것이기 때문에, 『대학』의 저자는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그 집안을 가지런히 하는 데 달려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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