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몸을 닦는 것이 그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 있다는 것은, 몸에 분하고 성냄이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요, 무섭고 두려워함이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요, 좋아하고 즐김이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요, 근심하고 걱정함이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음이 여기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이를 일컬어 몸을 닦는 것은 그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 놓여 있다고 한 것이다.
所謂修身在正其心者, 身有所忿懥, 則不得其正, 有所恐懼, 則不得其正, 有所好樂, 則不得其正, 有所憂患, 則不得其正. 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 此謂修身在正其心.
전(傳) 7장은 8조목 중에서 ‘정심(正心)’을 풀이한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마음’을 이야기하지 않고 ‘몸[身]’을 이야기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송나라 때 유학자 정이천(程伊川, 程子)은 ‘신유소(身有所)’의 ‘신(身)’을 ‘심(心)’의 잘못으로 보았고, 주희 역시 이 학설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주희는 “분치(忿懥, 분하고 성냄), 공구(恐懼, 무섭고 두려워함), 호요(好樂, 좋아하고 즐김), 우환(憂患, 근심하고 걱정함)”을 “마음의 작용”으로 보고, “마음을 살필 수 없으면 욕망이 일어나고 감정이 넘치는 까닭에 마음의 작용이 행하는 바가 그 올바름을 잃을 수밖에 없다.[一有之而不能察, 則欲動情勝, 而其用之所行, 或不能不失其正矣]”라고 풀이했습니다.
그러나 정약용은 ‘신유소’의 ‘신’은 ‘수신’과 이어지는 것이므로 말 그대로 놓고 풀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김용옥은 정약용을 이어받아 “분치 · 공구 · 호요 · 우환의 감정이 나의 존재로부터 묵살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감정의 치우침에 의하여 내 몸이 지배를 받으면 마음이 바르게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는 “이미 『순자』, 『장자』, 『노자』, 『관자』 등에서 무수히 발견”되는 것으로 『대학』에서 말하는 ‘정심’은 이를 종합했다는 것입니다. 가령, 『논어』에서 안회를 가리켜 “불천노(不遷怒)”라고 했는데, 김용옥은 이 구절이 감정을 절제하여 치우치지 않는 상태인 ‘정심’의 뜻을 함축한다고 봅니다. “성냄을 옮기지 않는다”라는 말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감정을 바루어 하늘의 도에서 어긋나지 않으려고 애쓰는 행위를 군자의 표상으로 삼았다는 뜻입니다. 요즈음엔 주희의 학설보다는 정약용을 학설을 좇아 풀이하는 바가 더 흔한 듯합니다. 한 문장씩 읽겠습니다.
이른바 몸을 닦는 것이 그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 있다는 것은, 몸에 분하고 성냄이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요, 무섭고 두려워함이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요, 좋아하고 즐김이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요, 근심하고 걱정함이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所謂修身在正其心者, 身有所忿懥, 則不得其正, 有所恐懼, 則不得其正, 有所好樂, 則不得其正, 有所憂患, 則不得其正.
신유소분치(身有所忿懥)에서 ‘신(身)’은 마음이 깃들어 있는 몸을 가리킵니다. ‘자신’이라고 풀이할 수도 있습니다. 분치(忿懥)는 분하고 성내는 것입니다. 공구(恐懼)는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호요(好樂)는 좋아하고 즐기는 것입니다. 우환(憂患)은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는 모두 마음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것으로,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지나쳐서 마음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끊임없이 살핌으로써 마음이 곧음에 머무를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몸은 마음이 작용하는 대로 움직이므로, 마음이 곧음에 머무르지 않으면 그 몸의 움직임에 반드시 치우치는 바가 생겨나서 맑아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마음에 분함이나 두려워함이나 좋아함이나 걱정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바가 있더라도 이를 잘 살펴서 바로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게 좋겠습니다.
마음이 여기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이를 일컬어 몸을 닦는 것은 그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 놓여 있다고 한 것이다. 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 此謂修身在正其心.
심부재언(心不在焉)에서 ‘언(焉)’은 ‘어시(於是)’, 즉 ‘여기에’라는 뜻입니다. 중국 사람들은 ‘심부재언’을 흔히 “멍하니 있다, 넋 놓고 있다”는 뜻의 관용어구로 쓰곤 합니다. 김용옥은 『순자』와 『관자』에도 이와 비슷한 표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말은 선진시대에 널리 알려진 표현 중 하나였다고 봅니다. 이를 수신(修身)과 연결함으로써 몸과 마음이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통찰하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마음의 중요성을 수양의 중심에 둔 것이 『대학』의 위대함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뜻을 두고 있지 않으면, 몸이 잘못되는 걸 보아도 전혀 보이지 않고, 누군가가 말해 주어도 전혀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맛인들 느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그 몸을 닦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마음이 바로서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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