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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절각획선(切角劃線)

고요에 대하여(이남호)

고요는 우리를 향기롭고 높은 세계로 데려간다. 세상의 변화는 점점 고요를 바보로 만들지만, 고요는 바보가 아니다.

―이남호




올해 열세 번째 책으로 고른 것은 이남호의 『일요일의 마음』(생각의나무, 2007)이다. 단정하고 우아한 고독의 문장들로 가득 찬 에세이집이다. 

제목 ‘일요일의 마음’은 미당 서정주의 시 「일요일이 오거던」에서 따왔다. “일요일이 오거던/ 친구여/ 인제는 우리 눈 아조 다 깨여서/ 찾다 찾다 놓아 둔/ 우리 아직 못 찾은 마지막 골목들을 찾아가 볼까”로 끝나는 성찰의 시다. 

“찾다 찾다 놓아 둔” “마지막 골목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추구하나 끝내 챙기지 못했던 아름다운 가치들을 상징한다. 그건 일상의 부단한 번잡함 속에서는 도저히 찾지 못할 것이다. 오직 “일요일”에만, 고요와 정숙과 휴식을 확보한 가능성의 시간에서만 간신히 일구어 보려는 엄두를 낼 수 있다. “찾아가 볼까”라는 시의 권유는 가능태로부터 실태로 옮겨 가려는 위대한 전환의 촉구처럼 들린다. 

이 에세이집 ‘일요일의 마음’은 일상의 순간들로 고독한 성찰의 시간을 옮겨 두려는 한 미학주의자의 섬세한 분투를 보여주는 귀한 에세이집이다. 절판이 아쉬울 뿐이다. 같이 읽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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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이성은 행복의 언어가 아니다. (17쪽)


고요는 사람을 다른 세계로 데려가는 비밀통로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중략) 고요를 구하는 것 자체가 공부가 된다. 고요함을 배우고 얻는 것이 옛사람들에게는 공부의 중요한 일부였다. (중략) 고요는 우리를 세속의 번뇌와 혼잡을 넘어서 진리의 세계로 데려가는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혼의 결핍을 강하게 느낄 때 간절하게 고요한 공간으로 찾아가려 하는 것 같다. (19~20쪽)


나는 음표는 몰라도 쉼표는 다른 피아니스트들보다 더 잘 연주한다. (아르투르 슈나벨)


고요는 우리를 향기롭고 높은 세계로 데려간다. 세상의 변화는 점점 고요를 바보로 만들지만, 고요는 바보가 아니다. (23쪽)


세상에는 세 문장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베른트 하인리히, 『숲에 사는 즐거움』에서)


가장 놀이를 많이 하는 여우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가장 많은 것을 배운다. (베른트 하인리히, 『숲에 사는 즐거움』에서)


활동의 삶은 근면하며, 명상의 삶은 조용하다. 활동의 삶은 대중 속에서 영위되며, 명상의 삶은 사막에서 영위된다. 활동의 삶은 이웃을 필요로 하게끔 되어 있지만, 명상의 삶은 하느님을 보게끔 되어 있다. (12세기 위그 드 생 빅토르)


자신의 예술을 완성시키고자 하는 인간의 주요 자질은 부정의 능력, 즉 사실들과 이성을 좇는 데 달려들지 않고 불확실성과 신비․의심 가운데 머무를 수 있는 능력이다. (존 키츠)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한 작품을 창조하고자 하는 예술가라면 누구나 사회 생활 면에서 다소 뒤떨어진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글렌 굴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때보다 사람이 더 활동적인 순간은 없으며, 고독 속에서만큼이나 혼자가 아닌 순간도 없다. (키케로)


활기는 그를 피곤하게 했고, 감정의 표명은 그를 녹초로 만들었다. 포기를 체득하며 자라 자신의 내면에 아주 작은 자로 남아서 자신과 다른 이들 사이에 벽을 세우지 않을 수 없는 이들에게 숨겨져 있는 상냥함을 그는 지니고 있었다. (미셀 슈나이더,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중에서)


굴드는 피아노를 연주하듯이 질병을 이용했다. 병은 고독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프루스트가 병을 이용한 방식으로, 그는 병으로 강요된 은거 속에서 창조적 자원과 정신적 기회를 찾을 수 있었다. (미셀 슈나이더,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중에서)


내가 말하는 고독은 물론 ‘다른 사람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지만 이 순간 나는 나 자신을 벗삼고 있다. 반면 내가 혼자 있든 누구와 함께 있든 나 자신이 내게 결핍되어 있을 때, ‘내게 결핍되어 있는 그 누구’가 다름 아닌 나 자신일 때, 이런 상태는 고립이다. (미셀 슈나이더,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중에서)


자신의 생각들과 함께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 어렵지 않게 침묵을 공유할 수 있는 능력, 상대방을 괴롭히지 않고 그의 공격을 살짝 피해갈 수 있는 능력, 이런 것들이 우정의 본질이 아닌가? (미셀 슈나이더,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중에서)


굴드에게 음악은 일종의 ‘아래’에 대한 사랑이다. 음향은 아래로부터, 피아노로부터 오는 것이지, 몸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 손가락은 단지 이 음향을 해방시키기 위해 있다는 생각. 아무리 낮게 내려가도 지나치지 않다는 것이다. (미셀 슈나이더,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중에서)


봄은 쉽고 성급하게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망과 좌절을 거쳐서 온다. 실망과 좌절 속에서 우리의 마음이 조심스럽고 겸손해질 때, 봄은 우리 것이 될 수 있다. (73쪽)


모든 지혜와 시, 과학의 / 가장 깊고 깨끗한 의미가,/ 모든 질문의 신비로운 힘과/ 그것을 해결하는 열쇠와 말이/ 정신의 진수가/ 신비로운 명저 속에 가득 담겨 있었네./ 모든 종류의 의문이나 비밀의 실마리가/ 거기 숨어 있었네. 신비로운 시간의 은혜를/ 받은 자는 그 열쇠를 손에 넣었지. (헤르만 헤세, 『유리알 유희』 중에서)


‘유리알 유희’는 학문과 예술, 지성과 감성, 내용과 형식의 완벽한 조화와 통일을 보여주는 정신의 완전함을 상징하는 놀이이다. (102쪽)


이 명랑성에 이르는 것이 나로서는,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으로서는 가장 고귀한 목표일세. 종단 본부의 장로 중에도 그런 사람이 몇 명 있네. 그 명랑성은 조롱도, 자기만족도 아닌 최고의 인식과 사랑, 모든 현실의 긍정이네. 모든 심연을 자각하는 일이야. 성자와 기사의 미덕이지. 흩어놓을 수 없는 것이고, 나이가 들고 죽음이 가까워짐에 따라 더욱 밝아지는 것이야. 그것은 아름다움의 비밀이고 모든 예술의 본체이네. 인생의 화려함이나 두려움을 찬양하는 시인, 또는 그것을 순수한 현실로 울리게 하는 음악가는 눈물과 고통스러운 긴장상태에서 우리를 이끌지만 곧 빛을 던져주고 지상의 기쁨과 밝음을 증대시키네. 시인은 슬픈 단독자이고 음악가는 우울한 몽상가일지도 몰라. 그렇지만 그의 작품은 모든 신들과 별들의 명랑성을 내포하고 있네. 그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이미 그 어둠이나 고뇌나 불안이 아니라 순수한 빛, 영원한 명랑성의 한 방울이네. 모든 민족과 언어가 신호, 우주론, 종교 따위로 세계의 심오한 빛을 더듬으려고 할 때에도,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이란 이 명랑성이네. (헤르만 헤세, 『유리알 유희』 중에서)


원래 제자리에 멈춰 있던 것과 한바퀴 돌아서 제자리를 찾아온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여러 차원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 처음부터 순종적인 자와 돌아온 탕아의 차이가 될 수도 있고, 시인이 아닌 자와 시인이면서 시를 안 쓰는 자의 차이가 될 수도 있다. (113쪽)


단 몇 개의 단어와 문맥에 의존해서 독자들은 우골리노가 처했던 상황과 그의 감정까지도 재구성해 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동원되는 것이 상상력이다. 독자들은 상상력으로 작품 속의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 낸다. 상상력은 문학 작품의 생산에 있어서도 가장 강력하고 필수적인 도구이지만, 문학 작품의 이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도구이다. (중략) 「빠삐용」에서 관객이 본 감옥과 관객이 들었던 문 잠기는 소리는 단 하나이지만, 『신곡』에서 독자들이 본 탑의 감방과 문 잠기는 소리는 독자들마다 다 다르다. 언어는 보잘것없는 기호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상상력의 도움을 받으면 세계보다 더 큰 것도 보여줄 수 있다. 한 편의 짧은 시가 우주를 담고 있다는 말도 이런 뜻에서 이해된다. 나에게는 『신곡』의 ‘문이 잠기는 소리’가 「빠삐용」의 그것보다 훨씬 무시무시하게 느껴진다. (124~125쪽)


좋은 생각이란 매달리는 것이 아니다. 골똘한 생각이 의심을 키우고 나아가 비극적 결말에 이르는 드라마들을 종종 본다. (중략) 골똘한 생각이 필요할 때도 물론 있겠지만, 어렵고 복잡한 문제에 처했을수록 의식적인 생각을 끊고 딴 곳에 정신을 파는 것이 좋다. (중략) 문제에 대한 의식적인 생각을 버리고 정신을 딴 곳에 파는 것이 진짜 심사숙고의 방식인지도 모른다. (148쪽)


폭포가 장관이라면 그것은 엄청난 물의 수난이 만들어내는 비극적 장엄 때문인 것 같다. 격렬하게 물의 몸에 가해지는 저 무서운 폭력! 폭포는 잔인한 폭력과 공포로 이루어진 기둥이다. (149쪽)


맑은 물이 짙푸르게 될 때 두려운 신비감이 생긴다. (150쪽)


물은 지혜롭다. 무거우면 엎드리고, 차면 기울고, 넘치면 흐르고, 때가 되면 잠적하여 순리를 완성한다. (158쪽)


삶은 쓸쓸함과 쓸쓸하지 않음의 두 겹으로 되어 있고, 세상은 남자와 여자라는 두 겹으로 되어 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겹을 이루면 그것은 사랑이 된다. 그러나 사랑 속에는 수많은 두 겹이 있기에 언제나 한 겹이 되고자 하는 사랑을 좌절시킨다. (중략) 아, 사랑에는 이렇게 많은 두 겹이 있고, 그 두 겹 사이는 낭떠러지처럼 아득하기만 한 것인가! 이문열의 『두 겹의 노래』는 사랑에 대한 가장 우울한 진단서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160쪽)


힘센 신이 한 인간의 삶을 철저하게 망가뜨릴 때, 그 인간이 보여 줄 수 있는 최선의 태도는 품위 있는 대응 정도가 아니겠는가. (166쪽)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내가 무엇인가 하기를 강렬히 원하면서도 아무것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무엇인가를 하고 싶으면 마치 샴쌍둥이처럼 하기 싫은 일이 동시에 내 눈앞에 쌍으로 나타났다. 그러니까 나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도 않았지만 혼자 있고 싶지도 않았다. 집에 틀어박혀 있기도 싫었고 외출하기도 싫었다. 여행을 하기도 싫었지만 로마에 계속 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리지 않고 싶지도 않았다. 깨어 있고 싶지도 않았지만 자기 싫은 것도 아니었다. (알베르토 모라비아, 『권태』 중에서)


나는 움직이지 않고 있는 우리 두 사람을 생각했다. 나의 부동성은 쓸모없고 소모적인 노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인 반면, 그녀의 부동성의 특징은 충만하고 풍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알베르토 모라비아, 『권태』 중에서)


항상 곁에 있으면서 아무것도 아닌 듯하면서 우리를 혼란과 절망과 집착에 빠지게 만드는 그 무엇은 사랑의 본질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 체칠리아와 같이 알 수 없는 여자에게 홀린 남자의 고통은 모든 인생의 고통에 대한 알레고리로 생각될 수도 있다. 삶을 권태롭게 여겼다가 아무것도 아닌 삶(체칠리아라는 여자)에게 크게 혼나는 이야기가 바로 『권태』가 아닐까? 체칠리아는 우리 모두가 벗어날 수 없는 사랑의 이름이기도 하고 또 삶의 이름이기도 하다. (187쪽)


언제 어떤 식으로 불행이 찾아올지 모르는 것이 인생이다. 인생은 무서운 호랑이를 곁에 두고 사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자기를 언제 해칠지 모르는 호랑이를 자기가 먹여 살려야 한다는 아이러니이다. 호랑이는 굶어죽기 직전에 소년을 잡아먹을 것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에 호랑이를 굶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 인생이라는 것도, 뜻밖의 불운이 미쳐 날뛰지 않게 하려면 그것을 잘 먹여 살려야 한다. (198~199쪽)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는 화려하고 멋진 것들이 많다. 값비싼 명품들도 많다. 그러나 그런 것들에 대해 눈길을 거두고, 관심의 마개를 막아야만 보이는 다른 세계의 명품들이 있다는 것이 옛 현자들의 가르침이다. 내 경험은 이제 그 가르침을 존중한다. 내 경험은 그동안 다른 세계의 명품을 갖기 위해서는 포기와 절제와 고독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해 주었다. 그러나 아직 내 마음이 선택한 세상에 대한 충성이 바위처럼 단단하지는 않다. 이 책에서 언급된, 내 마음이 머물렀던 아름다움들은 나의 일상에서 ‘취급 주의’라는 꼬리표를 달고 존재한다. (2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