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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절각획선(切角劃線)

배움에 대하여(우치다 타츠루)

우치다 다츠루의 『하류지향』(김경옥 옮김, 민들레, 2013)은 예전에 읽었던 책이다. 이번에 핸드폰의 앨범을 정리하면서, 사진으로 찍어 두었던 부분을 여기에 옮겨 적는다. 배움으로부터 도피하는 아이들에 대한 이 책은 교육 문제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다츠루의 견해는 배움의 무교환성에 대한 통찰에 기대어 있다. 배움이란 처음부터 비동기적 교환, 대가가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하는 교환에 기대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에서 즉각적으로 필요로 하는 인간을 길러내는 것은 교육의 목표가 아니라 ‘외계의 변화에 대응하여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배우도록 하는 것이 교육의 목표가 된다. 우치다 다츠루는 배움의 인류학적 의미는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배움이란 자기가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모르고, 그것이 어떤 가치와 의미와 유용성을 갖는지도 말할 수 없는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 오히려 자기가 무엇을 배우는지 몰라서, 그 가치와 의미와 유용성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배움이 일어나는 동기가 된다.


배움이란, 배우기 전에는 몰랐던 잣대로, 배우고 나서야 비로소 그 의미나 의의를 측정할 수 있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배우기 시작했을 때와 배우고 있는 도중, 그리고 다 배우고 난 뒤의 배움의 주체는 완전히 다른 인간으로 존재한다. 이것이 배움이라는 과정에 몸을 던진 주체의 운명이다.


소비란 본질적으로 무시간적인 행위이며, 소비자는 무시간적인 ‘유령’이다. 소비자는 상품과 화폐를 교환하는 전 기간에 걸쳐(그것이 현실에서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리든) 원리적으로는 ‘변화하지 않는 주체’로 정해져 있다. 물론 현실에서는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지 않는 인간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소비 주체로 일단 시장에 들어온 인간은 누구나 ‘등가 교환이 이루어지는 동안 소비 주체는 결코 변해서 안 되고 가치관을 바꿔서도 안 된다. 교환율도 바꿔서는 안 되며 자신이 측정하던 잣대를 바꿔서도 안 된다’는 엄중한 금기 사항을 지켜야만 한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어느새 배움의 장에 소비 주체로 등장해 버린 아이들도 이와 같은 금기 사항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배움에서 개발해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외계의 변화에 대응하여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배움의 인류학적 의미는 여기에 있다.


진정 ‘자기 찾기’를 하고자 한다면 타인과 무관한 존재로서의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포함한 이 네트워크는 어떤 구조이고, 이 속에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묻는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자기를 찾는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들의 시선은 오로지 내부로 향한다. 자신이 어떤 존재이며, 이 세상에서 무엇을 이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자기 안에 다 있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