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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절각획선(切角劃線)

헤밍웨이 등을 마저 읽으며 설 오후를 보내다

 

처가에서 집으로 돌아오니 벌써 오후 2시가 다 되었다. 별로 막히지 않은 것 같은데도, 은근히 길에서 시간을 다 보냈다. 문안 겸 어머니 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집에 돌아와 간단히 씻고 낮잠을 청했다. 그리고 미루어 두었던 책들을 꺼내 읽었다. 아울러 틈틈이 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했던 기획 좌담 내용을 정리 중이다. 얼마나 말을 많이 했던지 쳐내도, 쳐내도 끝이 없다.

헤밍웨이 단편선 1(김욱동 옮김, 민음사, 2013)을 거의 다 읽었다. 읽을수록 그동안 내가 하드보일드라는 스타일에 대해서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건 다만 문장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어떤 태도를 지칭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감정을 배제한 속도감 넘치고 극단적으로 간결한 문체란, 인생에 대한 극한의 허무주의와 같은 것은 아닐까. 한 편 한 편 읽어 갈수록 아무것도 아닌 시시한 사건들의 누적이 불러일으키는 거대한 공허 탓에 가슴이 저리고 아파서 도저히 견딜 수 없다. 압셍트 한 잔이 절실하게 그리워진다.

 

 

(1) 로버트 콜스, 하버드 문학 강의(정해영 옮김, 이순, 2012) 중에서

 

이 인정 없는 폭풍을 참아 내고 있는/ 불쌍하고 헐벗은 비참한 자들아/ 머리 둘 집도 없고 옆구리는 갈빗대가 앙상한데/ 구멍 나고 창이 난 누더기로/ 어떻게 이런 시기를 견디려는가? (리어 왕)(36)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맥락이 있다. 에이지는 부자와 권력자, 심지어 왕과 그 가족들까지도 상처와 고통, 기만과 배신을 겪는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촉구한다.(37)

우리는 어떻게 계급과 인종의 경계를 건너는가? 그리고 어떻게 서로를 알아 가는가? (중략) 우리의 삶 속에서, 가족과 이웃과 공동체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에 대한 행동 방식을 파악함으로써 알게 되는 것이다.(44)

개개인의 존재와 그들이 몸과 마음으로 경험하는 것들. 이들은 모두 그 자신과 뿌리에 대한 차별화된 표현이며 정체성이다. 이들 중 어떤 것도, 이 사람들 중 어떤 사람도 다른 존재에 의해 복제되거나 대체될 수 없으며, 과거에 똑같은 존재가 있었을 수 없다.(제임스 에이지) (46)

에이지가 얼마나 세심하게 형용사와 부사를 정의하고 사용하는지에 주목해 보자. 형용사와 부사는 우리가 묘사하려는 것을 완전하게 지배하기 위해 사용하기 쉬운 무기이다. 그는 끊임없이 형용사와 부사를 변경해서 우리를 미치게 한다. (48)

우왕좌왕하는 것, 그것이 인문학의 전통이다. 그렇지만 인문학, 즉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직을 찍은 사람들이 복잡성과 아이러니, 모호함, 모순을 이용하여 우리에게 전해 주는 것들은 개념화나 분류를 통해서 전부 해결되지 않지만, 어쨌든 진실에 다가가기 위한 일종의 접근법으로 환영받는다. (49) 이건 대단히 재밌는 통찰이다. 권도(權道)가 바로 우왕좌왕하는 게 아닌가? 상황에 따라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성인 공자가 우리에게 보여 준 가장 훌륭한 지혜이다.

에이지가 외부 세계와 철저히 단절된 채 글을 쓸 수 없듯이, 우리도 혼자서 읽고 말하고 생각하고 배우고 알 수 없다.(53)

자신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는 인간적인 상호 작용. 이것이 에이지가 접근하려는 문제의 본질이며 핵심이다. 그것은 인간의 개별성과 차이의 문제이다. (55)

 

 

(2) 에즈라 보걸, 덩샤오핑 평전(심규호, 유소영 옮김, 민음사, 2014) 중에서


 

물이 흐르면 저절로 도랑이 생기는 법이다.(水到渠成)”(화궈펑) (277) 모든 일은 때가 되는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뜻인데, 중국 지도자들은 이런 성어를 통해서 자신의 뜻을 암시하는 데 아주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런 능력은 어떤 교육을 받으면 생기는 것일까?

만약 누군가 한 일이 70퍼센트 정도 옳다면 아주 괜찮은 일일 것이다. 덩샤오핑은 만약 내가 죽은 후 인민들이 내가 한 일의 70퍼센트 정도가 옳다고 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좋은 일일 것이라고 말했다.(279)

4개 현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과학이며, 그것이 다른 3(산업, 농업, 국방) 현대화를 추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280)

솔직히 말해서 일을 할 때에는 두 가지 태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관리가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이지요.(282

한국, 일본, 대만, 싱가포르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대학 입학시험은 대학생과 취업자의 질적 향상을 가져왔다.(293우리 내부에서 끝없는 고통과 재앙의 원인으로 불리는 제도가 외국에서는 대개 이런 평가를 받는 것을 보면 우리가 입시에 대해 근본적으로 잘못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제도 자체의 이런저런 문제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빈부나 계급이나 성별이 이 제도에 대한 접근을 차별하지 않도록 하는 ‘복지로서의 교육’이라는 차원에 주목해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교육이란 일정 정도 서열화를 피할 수 없는 만큼, 이에 대한 비판이 교육 개혁의 핵심이 아니라 가난이나 출신이나 성이 질 높은 교육에 대한 접근을 차단하지 못하도록 모두에게 교육 기회를 과감하게 제공하는 쪽에 초점을 두어야 할 수도 있다. 심지어 원하면 누구나 무상으로 질 높은 사교육을 오히려 공공 자금을 통해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사교육 공공화까지도 검토해야 할지 모른다. 고3 딸과 고2 아들을 둔 학부모로서 그냥 답답해서 해 보는 신소리다.

진리를 평가하는 유일한 방법은 인민 대중의 광범위한 사회 경험이다.(298) 이 문건을 보니 대학 때 생각이 난다. 사실, 경험으로 진리를 평가한다는 것은 유물론에서 보면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푸코 이후, 지식이 곧 권력이라는 입장이 광범위하게 확산된 것을 보면, 현대는 경험론의 시대로 기록될 것이다. 근대 세계의 역사가 보여 주듯이, 경험은 인간의 저열한 욕구를 실현하는 것을 일차로 할 수 있기에, 늘 하늘의 도에 의해 경계되어야 한다. 천도(天道)와 인도(人道)의 합일, 새로운 시대의 철학은 이를 통합적으로 사고하는 것에 달려 있다.

 

 

(3) 괴테, 괴테 시 전집(전영애 옮김, 민음사, 2009) 중에서

 

여기 이 협소한 현존을 넓혀 / 영원으로 만들리. (초상화가의 노래) (97)

오 친구여, 진정한 행복은 제 분수를 아는 것이니 / 제 분수면 어디에서나 충분하다! (독수리와 비둘기) (104)

그녀가 온다! , 하늘의 선물, , 행복이로구나! (비유) (106)

좋지 못한 때에 자신을 몰아대지 말라 / 충만과 힘은 결코 멀리 있지 않으니. / 늘어지는 시간에 그대 쉬었다면 / 힘나는 시간에는 그대 갑절로 힘나리라. (작은 좌우명과 위안의 격언) (112)

얼마나 풍부하면서도 빈약한지! 얼마나 강하면서도 약한지!(언어) (112)

모사는 결코 원본이 되는 법이 없다. / 저 원화에서 자유로운 생명을 지닌 것 / 이 모사에서는 건조하고 뻣뻣하고 맥없다. / 매력적으로 서고 앉고 걷는 것이 / 여기에서는 꼬이고 뒤틀렸다. / 저기에서 투명하게 빛나고 작열하는 것이 / 여기에서는 낡은 오지항아리 같다. (중략) 예술가가 자신을 괴롭히면 괴롭힐수록 / 열심을 내면 낼수록 / 그만큼 더 이루어지는 법. 그러니 오로지 나날이 익혀라. / 그러면 무얼 할 수 있는지 알 것이다! (예술가의 신격화) (123)

젊은이란 두 날개를 쳐들어야 하는 법 / 사랑과 미움 속에서 힘차게 움직여야 하는 법. (예술가의 신격화) (128젊은이에게 사랑을 요구하는 시는 많지만 증오를 요구하는 시는 드물다. 사랑할 때 미움을 같이 통찰할 수 있다면 인생은 조금 쉬워지리라.

미덕은 어느 한 사람 속에만 있지 않고 / 예술은 결코 어떤 사람이 혼자 소유한 적이 없지. (예술가의 신격화) (129)

고귀한 사람은 그렇게 힘 있게 / 수백 년을 두고 자기 비슷한 사람에게 영향력을 미친다. / 선한 인간이 이룰 수 있는 것은 / 삶의 협소한 공간 안에서는 도달될 수 없기 때문이지. / 그렇게 그는 죽은 후에도 계속 살아 있고 / 살았을 때처럼 힘을 발휘한다. / 선한 행위, 아름다운 말은 / 죽지 않고 그 뜻을 펼쳐 간다. 죽을 운명의 예술가가 그 뜻 펼쳐 갔기에 / 그렇게 하여 너 또한 측정될 수 없는 시간을 살고 있다. / 너의 불멸을 즐기라! (예술가의 신격화) (134)

 

 

(4)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박철 옮김, 시공사, 2004) 중에서

 

아름다움이란 마치 특권이 있는 것처럼 사람의 정신을 정화하고 마음을 끄는 것이므로, 모두들 이 아름다운 무어 여인을 돕고 싶은 마음을 품었다. (526)

그것[인간의 문()]의 목적은 배분의 정의를 정확하게 하여 개개인 모두에게 적절히 분배함으로써 훌륭한 법규가 잘 이해되고 실행되도록 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528)

()는 목표를 평화에 두기 때문이며, 평화인즉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원하는 최고의 선()이기 때문입니다. (528)

누구나 학자로서 높은 위치에 오르려면, 오랜 세월을 불면, 배고픔, 헐벗음, 현기증, 소화 불량, 그 밖에 부수적인 것들을 견뎌야 한다. (533)


절각획선(切角劃線) - 2014년 2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