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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절각획선(切角劃線)

절각획선(切角劃線) - 2014년 1월 31일(금)

 

설이다. 새벽에 일어나 재계한 후 오전에는 제사 올리고 세배 치르고 아버지 유택에 참묘하느라, 오후에는 정체를 뚫고 다섯 시간에 걸쳐 대전 처가에 내려왔다. 몸이야 비록 고단하지만 이렇게 한 번씩 만나 쌓아 두지 않으면 가족, 친척 간의 인정도 금세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근대는 단단한 모든 것을 공중에 날려 버렸기에, 예절처럼 형태로써 마음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극도의 어색함, 또는 심하게 말하면 적대감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심형일체(心形一體)의 뜻을 되새겨 보는 것은 어쩌면 앞으로의 지식에 가장 시급한 것일 수 있다. 처가에 도착해 잠시 동서가 오기를 기다리는 사이를 틈타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박철 옮김, 시공사, 2004)와 로버트 콜스의 하버드 문학 강의(정해영 옮김, 이순, 2012)와 이중톈의 이중톈, 사람을 말하다(심규호 옮김, 중앙북스, 2013), 자다 깨다 하면서, 혼몽 중에 조금씩 읽었다.

이중톈은 노자부분을 읽었는데, 전해져 온 노자와 최근 발견된 백서 노자의 편들을 비교하여 텍스트와 그 의미를 확정해 가면서 병가(손자병법)와 법가(한비자)의 사유 방식과 대조하여 서술하는 부분은 뛰어나고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우리나라에서 백서 노자에 관한 연구가 얼마나 진전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관련 논문을 찾아서 보충해 공부하고픈 마음이 저절로 일었다. 아울러 최근 글항아리에서 계속해서 출간되는 리링의 여러 책들을 읽겠다고 결심했다. 새로운 사유를 통해 끊임없이 혁신되지 않으면, 낡은 지혜는 그대로 삭아 스러지는 법이다. 일본 쪽 논의가 최근에 거의 번역되어 소개되지 않는 듯하니, 이제 미국이나 중국 쪽 논의라도 열심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시대를 놓쳐 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로버트 콜스의 하버드 문학 강의의 부제는 문학의 사회적 성찰이다. 지난 가을에 읽었던 마사 누스봄의 시적 정의(박용준 옮김, 궁리, 2013)와 맥락을 같이하는 책이다. 시민에게 문학은 왜 필요한가, 문학은 사회와 어떤 관련을 맺는가와 같은 질문은 오늘날 한국의 문학 논의에서 근본적으로 누락되어 있다. 그런데 문학을 이야기할 때 이 질문은 정말로 누락될 수 있는 것일까? 이런 질문을 통하지 않고도 시민들, 그러니까 일반 독자들이 한국 문학을 사랑하도록 만드는 것이 가능할까? 요즈음 문학도로서, 편집자로서 내가 깊이 고민하는 것이다. 고민이 필요를 낳는 것이라면, 이런 책들을 자꾸 읽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1) 로버트 콜스, 하버드 문학 강의(정해영 옮김, 이순, 2012) 중에서

 


나는 하버드 대학에서 삶과 도덕적 용기를 되돌아보고, 우리 삶 속에서 도덕적 용기를 어떻게 키워 나갈 것인지에 대한 수업을 진행해 왔다.(7) 이런 수업은 어떨까? 지식과 정보를 주입하는 수업이 아니라 삶과 도덕적 용기에 대한 수업이라니! 미국은 확실히 특이한 국가다. 지배자의 국가답게 학생들한테 생존이 아니라 명예와 의무와 가치를 가르치려 한다. 사실, 이는 오랫동안 동양에서 사() 계급이 받아 왔던 교육이기도 하다. 수신(修身)으로써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를 이루려 했던 오랜 동양의 교육 윤리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를 맞아 산산이 사라지고, 그 후로는 거의 오로지 생존을 위한 기술 교육과 염치를 모르는 경쟁만이 남았다. 교육의 도덕적 차원을 회복하지 않는 한, 어쩌면 한국의 미래도 없다. 우리는 이제 후손들에게 성공을 가르칠 것이 아니라 가치를 현대적이고, 세련된 방식으로 가르쳐야 한다. 이게 가장 급하다.

빌리(빌리 할리데이)는 이 책에서 작가와 시인, 사진작가들과 마찬가지로, 학문과 문학과 예술적인 열정을 도덕적 관심과 질문들(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우리는 누구이고,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과 조화시키려고 애쓴 사람이다. (8)

외롭고 절망적일 수 있는 인생 속에서도, 우리는 궁극적으로, 그리고 이상적으로 서로에게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여행길에서 항상 서로 손을 잡고 있다. (10) 영화 관객』(마지 퍼시의 소설로 곧 박상미의 번역으로 민음사에서 나올 예정이다.)에 대한 글에서 나왔지만, 이것은 궁극적으로 위대한 예술이 항상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들과 우리 자신의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를 도덕적 성찰로 이끌고, 우리의 내적인 투쟁을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이끄는 작품들이 있다. 이러한 투쟁은 남들의 도움을 빌려 우리 자신을 좀 더 잘 알기 위한 투쟁이다. (18)

 

 

(2)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박철 옮김, 시공사, 2004) 중에서



불가능한 것을 찾는 사람은 가능한 것조차 빼앗기고 만다.(463)

희망이란 사랑과 함께 늘 생겨나는 법이다.(466)

사랑의 정열에 이기려면 오직 도망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어떤 누구도 그토록 강한 적과는 상대해서는 안 된다.(469)

내 가슴을 열어 보면/ 그곳에 새겨진 당신의 얼굴을 볼 수 있으리라.(474) 재밌는 표현!

사랑은 어떤 때는 날아가고, 어떤 때는 걸어가고, 어떤 이에겐 달려가고, 어떤 이에게는 천천히 간답니다. 그리고 이쪽에서 미지근해지면 반대쪽에서는 불을 태우고, 어떤 사람에게는 상처를 입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을 주고, 같은 장소에서도 한 곳에선 갈망의 달리기를 시작하는가 하면, 한 곳에선 끝내고 완결하는 것도 있고, 아침에 요새를 포위하면 밤에 굴복한다. 사랑에 저항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지요.(4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