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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절각획선(切角劃線)

절각획선(切角劃線) - 2014년 1월 29일(수)


 

새 소설 혁명 ―― 광활한 인간 정도전의 출간을 앞두고 탁환이 찾아와서 술을 마시느라 어제는 글을 쓰지 못했다. 아직도 피곤하고 머리가 아프다. 작취불성(昨醉不醒). 술만 마시면 거의 이러는 것을 보면 이제 술과 정말로 이별할 때가 된 듯하다. 읽던 책들을 계속 읽어 가면서 새로운 책을 몇 권 호시탐탐 엿보는 중이다.

헤밍웨이 단편선(김욱동 옮김, 민음사, 2013)을 짬날 때마다 한 편씩 읽고 있다. 건드리면 주르르 모래로 쏟아질 듯한 건조한 문체의 극단을 보여 주는 작품들이 이어진다. 극도로 절제된 감정, 사건의 적요(摘要)만 따르는 냉혹한 시선……. 읽다 보면 저절로 숨이 막혀 오다가 어느새 인생의 달고 쓴 맛이 느껴지는 마지막 문장에 이르고 만다. 사색이나 표현이 아니라 건조와 속도로 승부하는 문학의 새로운 경지. 오래전에 김성곤 선생님을 따라 영어로 떠듬거리며 읽었던 헤밍웨이의 단편이 생각난다. 그때는 단어 찾기와 뜻풀이에 지쳐서 이 맛을 몰랐다. 그때 알았더라면 내 문장도 지금과는 달랐을까? 새옹의 말(塞翁之馬)처럼 삶은 돌고 돈다.

괴테 시 전집(전영애 옮김, 민음사, 2009)는 우연히 손에 들어왔다. 거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쌓아 두었던 책을 정리하다가 뒤적여 읽게 되었는데, 구절들이 좋아서 한두 편씩 꾸준히 읽는 중이다. 사실 외국 시들을 우리말로 옮기고 나면, 그 리듬과 운율이 모조리 증발하기 때문에 구절들의 뜻과 기기묘묘한 표현들만이 남게 된다. 그리고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사고의 운동들, 즉 상상력이다. 따라서 외국 시 번역은 시에 대한 깊은 이해력, 우리말에 대한 표현력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 전영애 선생의 괴테 시 번역은 그런 뜻에서 아주 만족스럽다. 내 짧은 독일어 실력으로는 정확성을 따질 수 없지만, 능청능청 표현의 결을 잘 살린 것만은 틀림없다. 정민의 우리 한시 300(김영사, 2014)와 함께 이런 뛰어난 시집들을 읽는 것은 내 일상에 빛을 더해 준다.

이중톈의 이중톈, 사람을 말하다(심규호 옮김, 중앙북스, 2013)은 소파 옆에 부려 두고 어쩌다 재미로 읽는 책이다. 이중톈의 문장은 쉽고 명료하다. 그래서 오히려 아슬아슬하고 위험하다. 주역, 중용, 손자병법, 도덕경등을 통해 중국적 사유의 뿌리를 더듬으면서 사람이 살아가야 할 바를 단도직입적으로 설파한다. 그 논리는 단순해서 힘이 넘치고, 그 생각은 밝아서 사람 속을 들여다보는 듯하다. 머릿속에 전등을 켜 주는 느낌이다. 그러나 인생이나 사유는 누구에게나 곡절이 있고, 명암이 함께 있는 법이라서 좋은 글은 오히려 더듬거리는 언어로 쓰일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그러나 이 점을 충분히 고려하더라도 이 책은 대단히 재미있다는 점은 절대로 빠뜨릴 수 없다. 그것이 이중톈의 매력이다. 몸에 썩 좋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좀처럼 끊기 힘든 음식 같다.

에즈라 보걸의 덩샤오핑 평전(심규호, 유소영 옮김, 민음사, 2014)는 책 나오기 전에 교정지로 대충 넘겨 읽다가 출간 후 다시 손에 들었다. 이런 경우가 그다지 많지 않았던 것을 보면, 중국의 최상층부 이면에서 벌어진 온갖 일화들과 함께 오늘날 중국을 이끌고 있는 덩샤오핑의 삶과 사상에 대한 궁금함을 이길 수 없는 것 같다. 천여 쪽에 이르는 대작이어서 아직 절반도 읽지 못했지만, 이 책을 읽어 가면서 요즈음 중국에 대한 나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관심이 있는 것은, 나 자신한테 놀랍게도, ‘현대화를 둘러싼 사상 투쟁이었던 것이다.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사이의 끈질긴 협력과 대립,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는 문제를 놓고 벌어지는 두 사람 사이의 처절한 갈등은 자료를 한없이 집적하면서 서서히 기어를 올려 가는 저자의 글 솜씨를 통해 끝없이 마음을 파고든다.

심경호 교수의 동양 고전 강의――논어(민음사, 2013)은 예전에 동아일보에 연재했을 때, 대개 읽었던 글이다. 그러나 이번에 책을 내면서 많이 보충하고 수정했는데, 잔잔한 필치로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 풀이 글에, 논어의 한문 문장이나 구절에 대한 짧지만 정교한 해설을 다시 읽고 싶어서 한문 공부 겸 읽기 시작한 책이다. 매일 다섯 강의 정도씩 아침에 읽고 출근할 것이다. 매일 마음의 거울을 들여다보고 세상에 나서나니, 번잡해도 길을 잃지 않을 것이고 어지러워도 뜻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1) 지셴린(季羨林), 인생(이선아 옮김, 멜론, 2010) 중에서



옛날 천자에게 다투는 신하 일곱이 있으니/ 천하를 잃을 근심이 없네./ 제후에게 다투는 신하 다섯이 있으니/ 나라를 잃을 근심이 없네./ 사대부에게 다투는 신하 셋이 있으니/ 집안이 망할 근심이 없네./ 선비에게 직언하는 벗이 있어/ 명예를 욕보일 근심이 없네./ 아비에게는 직언하는 아들이 있어/ 불의에 빠질 근심이 없네. (효경) (102) 원문은 天子有爭臣七人/ 雖無道/ 不失其天下/ 諸侯有爭臣五人/ 雖無道/ 不失其國/ 大夫有爭臣三/ 人雖無道/ 不失其家/ 士有爭友/ 則身不離於令名/ 父有爭子/ 則身不陷於不義이다. 직역하면, “천자에게 다투는 신하 일곱이 있으면, 무도해도 천하를 잃지 않을 것이다. 제후에게 다투는 신하 다섯이 있으면, 무도해도 나라를 잃지 않을 것이다. 대부에게 다투는 신하 셋이 있으면, 사람이 무도해도 집안이 망하지 않을 것이다. 선비에게 다투는 벗이 있으면, 곧 몸이 명예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다투는 아들이 있으면, 곧 몸이 불의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정도이다. 사대부는 선비와 대부를 합친 말이므로, 원문에 사대부라고 된 것은 대부로 고쳐야 할 것이다.

늙은 천리마는 마구간에 누웠어도 마음은 천 리를 달리고, 열사는 말년이 되어도 비장한 웅지 꺾이지 않네.(조조) (111)  老驥伏櫪 志在千里, 烈士暮年 壯心不已이다. 보출하문행(步出夏門行)에 나오는 구절이다. 정치가 조조도 뛰어나지만, 시인 조조도 그에 못지않다. 언젠가 조조의 시들을 모두 옮겨보고 싶다.

사람들이 노년을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데는 네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고, 둘째는 신체가 쇠약해지기 때문이다. 셋째는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을 앗아가기 때문이고, 넷째는 죽음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키케로) (111)

수명을 다하고 죽은 것은 아주 보기 드문 특수한 죽음이다.(몽테뉴) (115)

사람의 활력은 이십 대 나이에 다 드러나니 사람의 위대한 업적은 어떤 것이든 서른 살 이전에 세워진다.(몽테뉴) (115)

노년에 하지 말아야 할 열 가지. 말을 삼가자. 나이로 유세 떨지 말자. 사고가 경직되는 것을 막자. 세월에 불복하자. 할 일 없음을 걱정하자. 무용담으로 허송세월하지 말자. 세상과 벽을 쌓지 말자. 늙음과 가난을 탄식하지 말자. 죽음에 연연하지 말자. 세상을 증오하지 말자.(117~141) 나이가 들어가는 탓인지, 여러모로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지셴린이 좌우명으로 삼았다는 도연명의 시구 해야 할 일을 다 했으니/ 더는 걱정하지 마시게.”(應盡便須盡, 無復獨多慮)의 도저한 긍정주의를 마음에 담아 두고 싶다.

오래 살려면 삼불三不에 유의하면 된다. 즉 운동, 편식, 걱정만 안 하면 된다.(157)

연못가에 핀 봄꽃 진 줄도 몰랐는데, 섬돌 앞 오동나무 잎에는 벌써 가을이 왔구나.”(주자) (161) 소년은 늙기 쉬우나 배우기는 어려우니(少年易老學難成)으로 시작하는 유명한 시구이다. 중학교 한문 교과서에서 읽었던 것 같다. 이 구절의 뜻에는 공감했지만, 그 지독한 교훈성 때문에 주자는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 구절 뒤에 이토록 감각적인 시구가 더 있었을 줄이야. 원문은 未覺池塘春草夢, 階前梧葉已秋聲이고, 거칠게 옮기면 연못가 봄풀의 꿈도 깨지 않았는데, 섬돌 앞 오동나무 잎은 벌써 가을 소리를 내누나.” 정도이다.

 

 

(2)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박철 옮김, 시공사, 2004) 중에서

 

산초야, 내가 이 철의 시대에 태어난 것은 황금의 시대, 소위 전성기를 되살리라는 하늘의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위험한 모험들, 위대한 업적들, 용감한 무훈들이 바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235) 이것이 인생을 흥미진진하게 살아가는 유일한 길일 수도 있다. 격동을 살아가거나 격동을 만들어 내거나, 둘 중 하나다.

탐욕이 과하면 자루가 찢어진다. (237)

원래 무서우면 더 잘 보이는 법이죠. 땅 속에 있는 것도 보이니 하늘에 있는 것들은 두말할 것도 없죠. (237)

옛날옛날 행운은 모든 사람에게 찾아오고, 불행은 그것을 구하는 사람에게만 오던 시절……. (239) 산초의 이야기 첫머리를 장식하는 이 구절은 돈키호테적 세계에 대한 통렬한 풍자이자 정의이다. 돈키호테는 불행을 구하는 자”, 슬픈 얼굴의 기사인 것이다.

여자들의 속성이란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무시하고 증오하는 자는 사랑하지. (240)

속담이 하나도 틀린 게 없는 것 같구나. 속담이라는 것은 모든 학문의 어머니인 경험에서 나온 것이니 말이다. (250)

여하튼 말브리노 투구를 알아본 내 입장에서는 모양이 어찌 변했건 상관없다. (254) 돈키호테는 본질만 보는 자이다. 그는 독수리의 눈으로 세계를 보며결코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는다. 그는 철학자이다.

천박한 자들에게 선을 베푸는 것은 바다에 물을 떠다 붓는 것과 다름없다. (281)

지난 시절의 모든 편력기사들은 대 시인이요, 대 음악가였다. 시인이자 음악가가 된다는 것은 제대로 말하자면, 사랑에 빠진 기사들에게는 부속물과도 같은 능력이다. 옛 기사들의 노래에는 정교함보다는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할 수 있지.(286)

재앙이란 놈은 숨어 있는 악마와 같아서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실수하거나 넘어진 사람에게 불쑥 달려들지요. (290)

하늘이 내리는 불행을 막는 데에는 현세의 부귀영화가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더군요. (301)

펜이란 혀끝보다도 더욱 자유로운지라 많은 경우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마음의 담대함은 더욱 커지고 혀끝의 담대함은 잠들게 마련입니다. (301)

기사가 어떤 이유가 있어서 미쳤다면 뭐 그리 감동적이겠느냐? 중요한 것은 어떤 이유 없이도 광기에 사로잡힐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둘시네아 공주님이 아무 일 없을 때도 이 정도니 위급한 상황이라도 발생하면 어떨지를 알게 하는 것이다. (316)

네가 나와 함께 더불어 편력한 지도 꽤나 되었건만 겉으로 보기에는 편력기사들이 하는 모든 일들이 망상적이고 어리석으며 미친 듯해 보여도 사실을 전혀 아니라는 것을 어찌 모를 수 있단 말이냐? 겉으로 이렇게 보이는 것은 원래 그래서가 아니라 마법사들이 우리 주변을 오가면서 주변의 모든 것들을 자기들 기분에 따라, 즉 우리를 이롭게 하거나 괴멸시키고 싶다는 생각에 따라 둔갑시켰다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만들어 놓곤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너의 눈에는 이발사의 대야로 보이는 그것이 나에게는 말브리노의 투구로 보이는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또 다른 무엇으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318) 본질만 보는 자다운 대단히 멋진 말이다. 곧 그에게 본다는 것은 믿는다는 것이다. 그는 미쳤지만, 미침의 논리를 가지고 있기에 미치지 않았다.

내가 둘시네아 델 토보소 공주님을 사랑하기에, 그분은 나에게 지상에서 가장 고귀한 공주님인 것이다. 그래, 시인들이 나름대로 붙여 준 이름으로 예찬하는 모든 여인들이 다 실제로 있었던 것은 아니다. (중략) 대부분이 그들 시의 주인공으로 삼기 위해 가공해 낸 인물로, 이는 시인들 스스로를 사랑에 빠져 버린, 그리고 사랑할 만한 용기를 가진 남자로 그려 내고 싶어서였다.(327) 자신을 발화시켜 변신하기. ‘-되기상태로 옮겨 타기, 이는 인생을 위대하게 살기 위해 필수적인 능력이고, 이 능력은 오직 타자의 혀를 내 안에 습득할 수 있을 때에만 그럴 수 있다. 돈키호테는 독서를 통해 타자의 혀를 자기 안에 옮겨 올 수 있었다.

그 어떤 것보다도 강렬하게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두 가지 있는데, 바로 눈부신 아름다움과 좋은 평판이다.(327)


 

(3) 괴테, 괴테 시 전집(전영애 옮김, 민음사, 2009) 중에서

 

쌀쌀하기보다는 오히려 영리해져라. / 언제나 너희 자신의 가슴 편에서 전율하라. (28)

, 젊은이여, 현명해져라. 슬픈 인생의/가장 즐거운 시간을 헛되이 눈물로 보내지 말라. (34)

 

 

(4) 에즈라 보걸, 덩샤오핑 평전(심규호, 유소영 옮김, 민음사, 2014) 중에서

 

최고 영도자로서 덩샤오핑은 새로운 사상을 내놓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역할은 새로운 시스템을 계획하고 추진하는 전복적(顚覆的) 과정을 설계하고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여겼다.(36)

그는 권력의 현실을 인식할 줄 알았고, 가능한 범위에서만 일을 했다.(37)

덩샤오핑은 중요한 행사를 앞두었을 때, 시간이 되어 더 명료하고 과감하게 말할 수 있도록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혼자서 조용히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것을 좋아했다. (42)

그는 세부적인 사항은 일단 차치하고 주로 큰 주제부터 생각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사소한 일까지 챙기는 인물은 아니었다. (44)

난 대학을 다닌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내가 태어난 그날부터 인생이라는 대학을 다녔다고 생각합니다. 그곳은 신을 만나러 갈 때까지 졸업이란 것이 없습니다.”(51)

집중된 권력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상급자의 명령에 대한 복종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어느 정도의 민주를 허락하는가는 주위 환경을 변화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67)

실천가로서 덩샤오핑은, 철학자이며 시인이자 몽상가인 마오쩌둥보다 훨씬 현실적이었다.(85)

덩샤오핑은 과거 25년 동안 정치 운동에서 되풀이되었던 보복의 악순환을 끊고자 애썼다. 그는 운동의 목적은 낡은 원한을 갚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도전의 장을 준비하기 위한 정리정돈에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