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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소설 / 희곡 읽기

김영하,『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문학동네, 2010)를 읽다


예전에 이미 블로그에 올린 바 있지만, 요즘 김영하의 소설을 모두 구해 읽고 있다. 이런저런 읽을 일들 때문에 다소 늦추어진 탓에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문학동네, 2010)과 『호출』(문학동네, 2010)에 이어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문학동네, 2010)를 오늘에야 모두 읽을 수 있었다. 최근에 나온 『살인자의 기억법』(문학동네, 2013)을 읽은 것까지 감안하면 네 번째로 완독한 것이다. 예전에 모두 읽었지만, 디테일이 아주 새롭게 다가온다. 짤막한 글이라도 따로 쓰기에는 시간이 지나 버려 줄이지만,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10년 후쯤 다시 한 번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아홉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에서도 우연의 폭력과 생의 부조리, 주인공의 허무 의식과 자기 경멸이 결합된 미학주의가 김영하 소설의 여전한 수법이었다. 태도의 미학화. 거기에 아무 때나 툭, 툭 던져 대는 촌철하는 생의 비의들을 지렛대 삼아 김영하는 독자를 댄디즘의 추종자로 변신시킨다. 요즘에 비하면 어마어마하게 미숙한데도, 이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은 차마 어찌할 수 없는 마성을 품고 있다. 『살인자의 기억법』(문학동네, 2013)과 같은 완숙함은 기대하기 어렵지만, 이때의 김영하는 패기가 있고 용기도 있었다. 그래서 종래의 한국문학이 애써 외면하려 했던, 당시 첨단을 달렸던 신촌의 신선한 문화적 감각이 비로소 한국 소설 속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자, 그럼 다음 작품 『아랑은 왜』(문학동네, 2010)로!!!



=== 책 속에서

― 내겐 삶의 전 무게가 걸린 일이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저 뻔하디뻔한 치정일 뿐이다. (「사진관 살인 사건」)

― 이곳은 세상의 밑바닥이다. 쓰레기 하치장이다. 이곳에 들어오면 모든 것이 쓰레기로 변한다. 나는 그 쓰레기들을 치우며 산다. 쓰레기를 치우다 보면 모든 게 쓰레기로 보인다. 아름다운 사랑? 그런 건 없다. 정액으로 칠갑한 치정 사건이거나 그도 아니면 여고생의 일기장에나 들어 있을 치기 어린 감상이다. (「사진관 살인 사건」)

― 나에게만 보이고 상대방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들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이것이 형사의 노트북과 사진기의 공통점이다. (「사진관 살인 사건」)

개인적인 삶이란 없다. 우리의 모든 은밀한 욕망들은 늘 공적인 영역으로 튀어나올 준비가 되어 있다. 호리병에 갇힌 요괴처럼, 마개만 따 주면 모든 것을 해 줄 것처럼 속삭여 대지만 일단 세상 밖으로 나오면 거대한 괴물이 되어 우리를 덮치는 것이다. (「사진관 살인 사건」)

― 인생을 흉내내는 영화는 인생보다 더 지겹다.  (「흡혈귀」)

― 테트리스는 무한한 반복이다. 쌓음으로써 부수고 부숴야 쌓는다. 테트리스엔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좋다. 삼국지나 심시티처럼 인생을 모사하는 게임들은 싫다.  (「흡혈귀」)

― 누군가를 안고 있으면 그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흡혈귀」)

― 여자와 헤어지면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게 뭔지 알아? 촉감이야. 엉덩이, 가슴, 배에서 출렁이던 지방질. 골반에 부딪혀 오던 뼛조각들의 날카로움. 입속에서 충돌하던 앞이빨. 발가락과 발가락 사이의 촉촉함. 배란일이면 더 미끌해지는 너의 점액.  (「당신의 나무」)

― 내게 남아 있는 너의 흔적은 촉각뿐이다. 그러니 가라. 내게 남아 있는 너의 언어는 없다. 음성 사서함의 메시지들은 지워졌고 자동 응답기의 음성도 삭제되었다.  (「당신의 나무」)

― 당신 역시 당신의 삶에 날아 들어온 작은 씨앗에 대해 생각한다. 아마도 당신 머리 어딘가에 떨어졌을, 그리하여 거대한 나무가 되어 당신의 뇌를 바수어 버리며 자라난, 이제는 제거 불능인 존재에 대해서.  (「당신의 나무」)

― 나무가 돌을 부수는가, 아니면 돌이 나무 가는 길을 막고 있는가.  (「당신의 나무」)

― LP의 음은 따뜻했다고, 바늘이 먼지를 긁을 때마다 내는 잡음이 정겨웠다고 말하는 인간들 말이다. 그런 이들은 잡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잡음에 묻어 있을 자신의 추억을 사랑하는 것이고, 추억을 사랑하는 자들은 추억이 없는 자들에 대해 폭력적이다.  (「바람이 분다」)

― 여행이란 그렇다. 그것이 일이든 여가든 오래 하다 보면 묵은 상처들이 드러난다. 그게 서로에게 소금이 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약이 된다. 조그만 외로움도 증폭되어 서로에게 전가된다.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