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평론과 서평/소설 / 희곡 읽기

비재(非在)들을 위한 점멸 화법 ― 조해진, 『아무도 보지 못한 숲』(민음사, 2013)을 읽고



여수는 물은 아름답고 사람은 넉넉했으며 음식은 맛있었다. 장어를 샤브샤브로 살짝 데쳐서 먹는 하모 유비키는 혀에 닿자 녹아 내렸고, 갓김치는 이에서 사각대더니 알싸한 맛을 정수리까지 전달했으며, 군평선이(금풍생이)와 서대 구이는 쫀득하게 씹히면서도 고소해서 자꾸 젓가락이 갔다. 갯벌에서 잡힌 각종 해물들을 한 상에 크게 차려 내는 갯것정식은 다채롭고 화려하고 신선했으며, 사이사이 각종 무침들과 맛 깊은 묵은지들은 밥을 불러들였다. 지난 겨울에 갔던 목포가 전라우도 음식의 극이라면, 올 여름 여수는 전라좌도 음식의 절정이었다. 

지난 주말부터 어제 저녁까지 사흘에 걸쳐 여수에 다녀오느라 전혀 글을 쓸 여유가 없었다. 회사 갔다가 돌아와 잠들기 전에 잠시 짬을 내서 지난주에 읽었던 조해진 장편소설 『아무도 보지 못한 숲』(민음사, 2013)에 대한 글을 짧게 썼다. 조해진은 2007년 민음사로 돌아와서 처음으로 주목했던 작가 중 하나인데, 올해 신동엽문학상을 받는 등 점차 중요한 작가로 떠오르고 있다. 언젠가 그의 소설에서 느꼈던 매력에 대해 기록해 두고 싶었다. 여기에 옮겨 둔다. 



비재(非在)들을 위한 점멸 화법

― 조해진, 『아무도 보지 못한 숲』(민음사, 2013)을 읽고


오늘날 한국 문학에서 조해진은 대단히 특이한 작가에 속한다.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사회적 관리 시스템이 누락해 버린, 그러니까 부재(不在)와 존재(存在)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자들, 차라리 비재(非在)라고 부르면 좋을 사람들(가야트리 스피박이 ‘서발턴’이라고 불렀던 이들에 가까운)에 대한 조해진의 꾸준한 탐구가 그 특이성을 만들어 내는 것만은 아니다. 첫 소설집인 『천사들의 도시』(민음사, 2008) 이래, 『한없이 멋진 꿈에』(문학동네, 2009)와 『로기완을 만났다』(창비, 2011)를 거쳐 이번 작품 『아무도 보지 못한 숲』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그 자체로도 독특할 정도의 깊이와 만만치 않은 너비를 점차로 형성해 가는 중이지만, 그래서 작가는 이런저런 문학상 후보로 자주 호명되었고 마침내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하기에 이르렀지만, 실은 조해진 소설의 특이성은 그들(비재들)의 발화를 끌어내는 낯선 화법에 엄중히 놓여 있다. 『천사들의 도시』에서 그 화법은 극단적으로 생생했으나 아직 거칠고 어눌한 상태였는데 점차로 숙성해서 최근 문예지에 발표한 단편들과 『아무도 보지 못한 숲』에서는 어떤 완숙함에 이르렀다.

나는 그 화법을 이번 작품에서 점멸법이라고 부르고 싶어졌다. 이는 조해진이 서술의 연속체인 소설에서 공백 또는 침묵을 문장 사이사이에 (아마 심리적 시간으로) ‘길게’ 끼워 넣는 방식으로, 마치 연극 무대에서처럼 암전과 함께 배우들이 사라졌다가 조명과 함께 등장해서 이야기를 계속하는 그런 방식으로, 어쩌면 시간 예술로서의 소설 안에서 공간 예술로서의 소설을 배태하는 혁신적인 방식으로 소설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자의 발화는 안이하기 쉽고, 부재하는 자의 침묵은 흔히 시끄러워져 버린다. 조해진의 소설에는 발화의 연속체가 빚어 내는 사건들의 집요한 연쇄도 없고, 침묵의 퇴적이 쌓아 올린 관념들의 쓸데없는 집적도 없다. 극도로 절제된 단문 문장으로 이루어지는 조해진의 화법은 정말 경제적이다. 군더더기를 거의 허용하지 않는다. 오직 ‘흔적’으로만 표시되는, 분명히 눈앞에 존재하는데 사실은 유령인, 과거에 죽어 없어져 이미 유령인 줄로만 알았는데 사실은 존재인 어떤 자, 그러니까 소년은 결코 길게 말하거나 이어서 말하거나 추상적으로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순간적으로 출몰하고 외마디 비명처럼 짧게 소리쳐 말하고 구체성 위를 달려 다닌다.

주민등록이 말소된, 도망친 엄마의 빚 대신에 죽은 자가 되어 한낱 보상금으로 화한 자, 죽음 이후로서 삶을 살아가는 이 기이한 자는, 유언비어처럼 흘러다니면서 해충처럼 존재의 존재성 또는 부재의 부재성을 잡아먹는다. 그를 소설 속으로 호출함으로써 조해진은 스위치를 올릴 때에만 불이 들어오는 꼬마 전구 같은, 오직 빛이 있을 때에만 존재하고 어둠이 켜질 때에는 부재하는, 존재 전체가 온과 오프를 왔다갔다하는 비재로서의 삶을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는 존재들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그런 식으로 우리 자신도 언제든지 기우뚱 무너져 내려 비재화되어 버릴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사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심리적 등등의 곤궁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 같은 부재를 택하거나 가출이나 노숙과 같은 비재를 택하고 있는가.

『아무도 보지 못한 숲』의 인물들은, 서로를 점멸하면서 우리 삶의 전면적 비실체성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엄마가 가르쳐 준 마법의 주문, 그러니까 ‘하나, 둘, 셋’ 하고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살짝 분리된 장면들이 비선형적으로 떠오른다. 무대 위에 과거-현재-미래로부터 온 모든 ‘나들’(미수와 현수와 윤이면서 M과 야구모자와 남자인)이 서 있고, 불이 들어올 때마다 차례로, 어쩌면 한꺼번에 소리지르는, 그렇게 두서없이 등장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머릿속에 뒤얽혀 있다가 갑자기 동시에 명료해지는 강렬한 체험이 우리를 두드린다. 조해진 소설의 묘한 특이성, 이상한 중독성(한 번 읽고 나서 또 읽고 싶어지는)은 아마 이런 특수한 화법의 결과일 것이다. 시간이 공간으로 변화함에 따라, 시간 규칙에 따라 존재와 부재로서 표시된 모든 정체성이 일제히 비정체성으로, 아이디 말소로 표시되는, 그리하여 현실 속에서 이미 비존재로서 존재하는 모든 이에 대한 관심이 불처럼 일어나는 경험. 이것이 조해진 소설의 참된 매력이다.

비재에서 존재로 나아가는 현실적인 길이 막혀 있기에, 작가는 이야기의 앞과 뒤에 동화적, 몽환적 숲속의 세계를 장치해 둘 수밖에 없었다. 비재가 존재로 돌아올 길은, 유령이 무(無)를 딛고 현실로 나아올 길은 「헨젤과 그레텔」 같은 동화에서만 간신히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불가능한 동화가 지나치게 아름다워서 결코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우리들, 비재들을 유혹한다. 나는 유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