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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소설 / 희곡 읽기

게오르크 뷔히너의 『보이체크 · 당통의 죽음』(홍성광 옮김, 민음사, 2013)을 보고 읽고 듣다



어떤 책은 사람과의 만남 속에서 내 삶으로 들어온다. 요즘 읽은 책 중 하나인 게오르크 뷔히너의 보이체크 · 당통의 죽음(홍성광 옮김, 민음사, 2013)이 그렇다. 사실 나는 이 작품에 대해 잘 몰랐다. 뷔히너라면 작품을 제대로 읽어 본 적은 없고,(물론 대학 다닐 때  당통의 죽음』을 읽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게오르크 뷔히너 상이라는 독일 최고의 문학상 중 하나에 붙은 이름으로 주로 들어 보았을 뿐이었다. 물론 이 문학상이 범상치 않은 것인 만큼 그 작품의 무게와 깊이도 남다를 것이 틀림없어 보였지만, 희곡이라서 그런지 좀처럼 읽어 볼 마음이 일지 않았다.

그런데 기적처럼 뷔히너의 희곡을 읽게 된 계기가 연속으로 내 삶에서 일어났다. 그 첫 번째는 풍월당 대표이자 음악 평론가인 박종호 선생과의 만남이다. 작년에 정혜윤의 『삶을 바꾸는 책 읽기』(민음사, 2012)를 펴내면서 여러 번 독자 행사를 열었는데, 그중 하나로 정혜윤과 박종호 두 사람이 함께 독자들을 만나 책과 음악과 인생을 이야기하는 자리가 풍월당에서 열렸다. 다른 일정 때문에 나는 이 자리에는 직접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이 일을 계기로 나는 박종호 선생을 만나게 되었고 만나는 순간 그 고급 예술에 대한 열정에 반해 버렸다. 그래서 함께 음악과 예술과 문학에 나타나는 여러 중요한 주제들을 횡단하면서 한꺼번에 다루는, 오페라에 대한 책이 아니라 오페라적인 예술 교양서를 만들기로 했다. 

그때 박 선생이 나한테 해 준 이야기 중 하나가 알반 베르크의 오페라 『보체크(Wozzeck)』와 게오르크 뷔히너의 희곡 『보이체크(Woyzeck)』에 대한 것이다. 알반 베르크의 오페라 『보체크(Wozzeck)』는 뷔히너의 작품을 오페라로 만든 것이다. 악보업자의 실수로 '보이체크'가 '보체크'가 되는 어마어마한 참사가 일어났지만(어떤 경우에는 오자 하나가 역사를 바꾼다.) 각자의 장르에서 획기적인 이정표가 된 두 작품은 예술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변주 중 하나가 되었다. 따라서 뷔히너의 희곡 『보이체크』를 읽지 않는다면 알반 베르크의 오페라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알반 베르크를 보고 듣지 않고 뷔히너의 현재성을 알아채는 것도 어렵다는 것이다. 문학과 음악과 미술이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현재 속에서 끊임없이 서로를 성숙시키는 종합적 장면이야말로 예술의 본 모습이고, 따라서 책을 읽지 않는 음악, 음악을 듣지 않는 문학이 빈번해지는 한국 사회의 흐름은 기형이라는 것이다. 이 말에 나는 가슴이 뜨끔했다. 굳이 말한다면, 나 역시 음악을 듣지 않는 문학에 속했으니까.



그러나 일상의 분주함은 모든 것을 지나치게 만든다. 읽지 않는다면 결단코 내 것이 아닌데, 나는 그 무렵 회사에서 나온 보이체크 · 당통의 죽음』을 눈앞에 버젓이 두고도 이 책을 읽을 짬을 전혀 내지 못했다.(물론 전적으로 이는 핑게다. 행정이 읽기를 압도할 때 편집은 살해당한다.) 박종호 선생과는 그 후로도 몇 번 만났지만, 나는 알반 베르크를 듣지도, 뷔히너를 읽지도 않고 계속해서 세월을 흘려 보냈다. 

그런데 또 다른 중요한 인연이 생겨났다. 갑자기 명동예술극장장 구자흥 선생께서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세계문학전집에 실려 있는 여러 희곡들을 잘 읽고 있다면서, 마침 명동예술극장에서 『보이체크』(국내 공연 제목은 맞춤법과는 상관없이 오랜 관행에 따라 『보이첵』이다.)를 공연하고 있으니 구경하러 오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주 금요일 저녁에 후배 두 사람과 함께 연극을 보러 갔다. 임도완 연출, 극단 사다리움직임연구소의 공연이었다. 아주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격렬하게 표현된 『보이체크』였다. 오랜 레퍼토리여서 그런지, 배우들의 연기는 아주 능숙했고 공연 1시간 10분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의자라는 소품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해 무대를 구획짓고, 지속적인 가난과 억압 속에서 한낱 의사의 실험체로 전락한 데다 군악대장과 아내 마리의 불륜 사실을 알고 조금씩 미쳐 가면서 이성의 언어를 잃어가는 주인공 보이체크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배우들의 집단적 움직임을 통해 효과적으로 표현한 작품이었다.


 


어쨌든 나는 이런저런 일을 계기로 드디어 공연을 보러 가기 전에 보이체크 · 당통의 죽음』을 읽기로 결심했고, 천천히 이 충격적인 작품을 읽어 나갔다. 이 작품을 쓴 뷔히너는 죽을 때 겨우 스물네 살이었다. 남긴 작품도 보이체크』,『당통의 죽음』, 『레옹스와 레나』 등 희곡 세 작품과 장편소설 『렌츠』 등 모두 네 작품에 불과했다. 천재의 나이를 생물학적으로만 따지는 건 부질없는 짓이고, 문학의 위대를 작품의 수로만 이야기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지만, 믿기 어려웠다. 게다가 뷔히너는 이미 스무 살에 혁명가로 수배되어 도망다니기 시작했고, 망명 중 학위 공부도 하면서 틈틈이 쓴 작품들이다. 그런데 깊었다. 깊고 넓었다. 독일의 스무 살에 대한 질투가 솟구쳐 올랐다. 독일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한 미완의 희곡 보이체크』는 사회적, 문화적 억압 속에서 세계의 가혹함을 견디지 못하고 점차 자아가 붕괴되어 가는 한 가난한 병사의 삶을 담았다. 이성 또는 감정으로 설명되지 않는 심리의 세계가 따로 있다는 것, 그 세계야말로 인간 본성의 목소리에 가장 가까운 소리를 낸다는 것을, 프로이트도 없이, 뷔히너는 그보다 한 세기 전에 벌써 알아챘던 것이다. 뷔히너가 "사람이란 이성적인 바보에 불과해."라고 쓴 것은 스물네 살 때, 1837년이다. 통찰은 늘 시간을 꿰뚫고 공간을 뛰어넘는다. 무서운 작품이다.

당통의 죽음』은 프랑스대혁명을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단순한 역사극이 아니라 프랑스대혁명의 핵심 지도자인 당통을 중심으로 혁명 이후 지도부에 나타난 심리적 혼란을 그린다. 요컨대 이 작품은 당통의 입버릇처럼 무(無)에 대한 것, 아니 공허에 대한 것이다. 뷔히너가 독일어로 무(無)를 무엇이라고 했는지 모르겠으나, 이 작품의 주인공은 공허이다. 혁명이 이루어진 후 왕당파 등 반혁명분자들에 대한, 내부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혁명가들에 대한 끝없는 학살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혁명 지도부를 삼킨 것은 권력에 대한 추악한 욕망과 동시에 거대한 공허이다. 이 공허를 이겨내고자 당통은 끊임없이 술과 여자에 탐닉하고, 로베스피에르는 더욱더 숨 막히는 도덕으로 무장해 버린다. 심리적 쌍생아. 그러니까 두 사람을 결국 모두 단두대로 보낸 것은 혁명이 아니라 공허였던 것이다. 당통의 말대로, "이 세상은 혼돈이야. 무(無)야말로 새로 태어날 세계의 신인 셈"(210쪽)이다.


=== 책 속 구절들

― 사람이란 이성적인 바보가 분명해. 

― 이들에겐 동물적 이성이 있고, 이성적 동물성도 있어요.

― 이 녀석은 인간이고 사람이며 짐승 같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짐승은 짐승입니다.

― 우리 같은 가난한 사람들에겐 말입니다, 대위님! 돈, 돈이 중요합니다! 돈 없는 자에겐 그런 도덕밖에 없단 말입니다! 그런 자에게도 피와 살은 있습니다. 우리 같은 것은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불행하기는 마찬가지죠. 하늘에 간다 해도 천둥 치는 일이나 돕겠죠.

― 당신은 너무 아름다워. 죽을 죄를 진 것처럼 어찌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마리?

― 날이 아주 잘 들지요. 이걸로 댁의 목을 자를 건가요? 자, 어쩌겠소? 다른 것처럼 헐값에 드리지요. 헐값에 죽을 수 있게요. 그래도 거저는 안 되지요. 어쩌겠소? 경제적으로 죽어야지요.

― 목수가 관을 짤 때에는 그 속에 누가 들어갈지 아무도 모르지.

(이상, 「보이체크」 중에서)

― 사람들은 무덤 속에 안식이 있고, 무덤과 안식은 같다고 하자. 그렇다면 내가 당신 품에 누워 있는 건 땅속에 묻혀 있는 거와 같아. 그대, 달콤한 무덤이여. 당신 입술은 죽음을 알리는 종이고, 당신 목소리는 장례 종소리고, 당신 가슴은 내 무덤의 봉분이며, 당신 심장은 내 관이야. (당통 대사)

― 국가 체제는 국민 몸에 딱 들어맞는 투명 옷 같아야 해. 맥박이나 근윤과 힘줄의 움직임이 그대로 드러나야 해. 겉모습이 아름답거나 추한 건 문제 되지 않아. 생긴 대로 살아갈 권리가 있는 거야. 우리 마음대로 남의 치마를 재단할 권리는 없어.

― '와'는 긴 단어야. 이 단어는 그들과 우리 사이를 꽤 멀리 갈라놓지. (당통 대사)

―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외침에는 메아리가 따르며, 근거가 있으면 귀결이 있는 법입니다.

― 공화국의 힘은 공포고, 공화국의 힘은 미덕입니다. 미덕이 없으면 공포는 부패하기 쉽고, 공포가 없으면 미덕은 무기력해집니다. 공포는 미덕의 발로이며, 신속하고 엄격한 불굴의 정의와 다름없습니다. (중략) 자유의 적들은 공포로 박살내야 합니다. (중략) 혁명 정부는 폭정에 반기를 드는, 자유의 전제 정치입니다. (로베스피에르 대사)

― 인간성을 억압하는 자들을 처벌하는 일이야말로 자선 행위이고, 그들을 용서하는 것은 야만 행위입니다. (로베스피에르)

― 자넨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어. 자신의 원래 모습을 죽임으로써 자기 자신을 살해하는 그림자란 말이야.(라크루아가 르장드르에게)

― 누구나 즐기기 위해서 사는 건 다 마찬가지니까. 육체를 즐기든, 성화(聖畵)를 보고 즐거움을 느끼든, 꽃이나 아이들 장난감으로 즐기든 마찬가지야. 가장 많이 즐기는 사람이 가장 많이 기도하는 법이지. (마리옹)

 둘 다 자비로운 수녀야. 모두 양로원에서 근무하지. 말하자면 자기 몸뚱이가 근무처야. (라크루아)

 혁명은 사투르누스와 같아서 자기 자식들을 잡아먹지. (당통)

 내가 칼을 빼 들 때, 내 팔을 막는 자는 다 내 적이야. (로베스피에르)

 정당방위가 끝나는 지점에서 살인이 시작되는 거야. (당통)

 나 같으면 삼십 년 동안이나 한결같이 도덕적인 얼굴로 하늘과 땅 사이를 돌아다니는 게 부끄러울 것 같아. 그건 나보다 남이 더 나쁘다고 생각하려는 고약한 심보에 불과해. (당통)

 양심이란 원숭이가 자기 앞에 놓고 보면서 고민하는 거울 같은 거야. 누구나 할 수 있는 만큼 자신을 치장하지. 그러면서 나름대로 즐거움을 누리는 거지. (당통)

 이 생각이 피 묻은 손가락으로 계속 저기, 저기 하고 가리켜! 헝겊으로 손가락을 아무리 단단히 동여매도 피가 계속 멈추지 않는구나. (로베스피에르)

― 난 피의 메시아야. 피의 메시아는 희생당하지 않고 남을 희생시키지.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로 인간을 구원했지만, 나는 그들 자신의 피로 그들을 구원하겠어. 그리스도는 인간이 죄를 범하게 했지만, 나는 스스로 죄를 짊어질 거야. 그리스도는 고통의 희열을 맛보았지만, 나는 사형 집행인의 고통을 맛볼 거야. 그렇다면 자신을 더 많이 부정한 자는 누구인가, 나인가 그리스도인가? (로베스피에르)

― 참 가여운 일이야. 줄 하나로 늘 같은 소리만 내는 초라한 악기가 된다는 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야. 난 그냥 편히 살고 싶었어. 이제 그렇게 되었어. 혁명으로 나는 안식을 얻었지.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안식이 아니었어. (중략) 우리가 혁명을 만든 게 아니라, 혁명이 우리를 만들었어. (당통)

― 나는 용감하게 죽을 수 있어. 사는 것보다는 그게 더 쉬울 거야. (당통)

― 우린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철사로 조종되는 꼭두각시야.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야! 우린 유령들이 쥐고 싸우는 칼이나 다름없어. (당통)

― 법의 도끼는 만인의 머리 위에 똑같이 걸려 있소.

― 혁명을 수행할 때, (중략) 도덕적 자연, 즉 인류의 전체 모습을 바꾸어 놓는 사건이 피를 통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까? (생쥐스트)

― 원인이 완전하다고 결과도 완전할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 완전한 것이라고 꼭 완전한 것만 창조할 수 있습니까? (메르시에)

― 악은 부정할 수 있어도 고통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오성만이 신을 증명할 수 있을 뿐, 감정은 신에게 반항합니다. (페인)

― 평등이 모든 사람의 머리 위에서 낫을 휘두르고 있어. (메르시에)

― 법적 절차를 거쳐서 서서히 진행되는 살인은 더욱 잔인하고 도저히 피할 수도 없어. 여러분, 나는 여러분 모두가 이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기원하겠소. (당통)

― 사적으로 뻔뻔스럽게 행동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내가 자유를 위해 그토록 자주 투쟁할 때 그토록 자주 보여 준 애국적인 뻔뻔함은 모든 덕목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입니다. (당통)

― 글 좀 잘 써 봐. 쉼표 하나하나가 내려치는 군도가 되고, 마침표 하나하나가 잘라 낸 머리가 되도록. (바레르)

― 창조가 자리를 다 차지하는 바람에, 무의 자리는 텅 비어 있어. 어딜 가나 창조가 득시글거려. 무는 자살했고, 창조는 무의 상터야. 우리는 무의 핏방울이고, 세계는 무가 썩어 가는 무덤이야. (당통)

― 죽음에는 희망이라는 게 없어. 삶이 좀 더 복잡하고 조직화된 부패라면 죽음은 더 단순한 부패일 뿐이지. 차이라면 그게 다야! (당통)

― 삶이란 창녀와 같아. 온 세상과 정을 통하니 말이야. (당통)

― 이 세상은 혼돈이야. 무(無)야말로 새로 태어날 세계의 신인 셈이지. (당통)

(「당통의 죽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