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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소설 / 희곡 읽기

어떤 짐승들의 언어 심리학적 독백 ―천운영 소설집, 『엄마도 아시다시피』(문학과지성사, 2013)을 읽다



책들이 글을 불러들이는 순간에 마침 시간도 있다는 것은 내겐 중요한 행운이다. 이 삶이 오래 계속될 수 있기를. 저녁을 먹은 뒤, 도저히 책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덥기에 문득, 이열치열,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천운영의 이번 소설집에 대한 여러 메모들이 비죽 노트에서 비어져 나와 있었다. 이게 눈에 띄지 않았다면, 아마 낮에 딸애와 같이 본 '고갱 전시회'나 '슈타이들 전'에 대해 썼을 것이다. 어쨌든 그 메모들을 두서없이 이어붙여 일단 여기에 올려 둔다.



어떤 짐승들의 언어 심리학적 독백

― 천운영 소설집, 『엄마도 아시다시피』(문학과지성사, 2013)을 읽다



1

지난주 천운영 소설집 『엄마도 아시다시피』(문학과지성사, 2013)을 모두 읽었다. 작가한테 선물받은 책을 막 읽으려는 즈음에 집사람이 먼저 가져가서 애지중지하는 바람에 본래보다 늦어져 버렸다. 이 소설집에는 표제작 「엄마도 아시다시피」를 비롯해 모두 일곱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대개 문예지에 발표할 때 읽은 것이지만, 이렇게 묶이고 나면 반드시 다른 얼굴을 보여 주는 법이니 기대가 있었다.


2

사물의 세부를 끌어들여 거기에 얽힌 인간들의 심사를 파고드는 천운영의 묘사 솜씨는 본래부터 세상에 유명했지만, 이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에서는 그 수준이 귀기(鬼氣)를 넘어서 어느새 무예(巫藝)로까지 느껴질 정도로 높아져 있었다. 「젓가락 여자」와 「스물세 개의 눈동자」에서 작가가 시도한 입담은 다만 묘사가 아니라, 눈앞에서 수다 떠는, 침이 낭자하게 터지는 듯한 호흡으로 단숨에 떠벌여 처리한, 해학 넘치는 입말의 생생함에 더해서 인간과 사회의 심층에서 일어나는 구조적 운동을 끊임없이 퍼올리는 글말의 엄정함이 솔기 없이 깨끗하게 바느질된 한국어의 또 다른 장관을 보여 준다. 나는, 작가의 입에서 독자의 머릿속으로 곧바로 쏟아지는 것 같은 천운영표 한국어 리듬, 단문들의 연쇄가 만들어 내는 이상한 만연체, 그러니까 이 간결한 만연체가 한없이 좋았다.


갈 데가 어디 있나. 찜질방으로 갔지. 개 짖는 소리 안 들으니까 세상 편하더만. 오줌 지린내도 안 나고. 저녁마다 개새끼들 산책 시키러 나가지 않아도 되고. 얼마나 좋아. 이틀을 잘 쉬었지. 냉탕과 온탕을 오가면서. 부글부글 끓었다가 푸르르 식었다가. 그런데 이틀 정도 지나니까 슬슬 답답하기도 하고 식당 미역국도 질리고. 그래서 나왔지. 나오고 보니 또 딱히 갈 데가 없어. 집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어디 가서 하소연할 수도 없고. 내 집 놔두고 이게 무슨 생고생인가 싶고. 바람이 휙 부는데. 왜 그렇게 슬프고 쓸쓸한지. 뛰쳐나온 건 난데. 버림받은 기분은 왜 드는지. 갑자기 눈물이 팽 도는데. 하염없이 걸어다녔어요. 길거리를 배회하는 개처럼. 코를 킁킁거리면서. 질질 짜면서 비실비실. 딱 버려진 개새끼더라구. 왜 버려졌는지 영문도 모르고서 언젠가 주인이 나타나겠지 믿고 있는 유기견. 혁명이고 구국의 결단이고 그런 게 다 뭐야. 명분 없는 쿠데타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차라리 개새끼였으면 싶더라구. 아내 옆에 있을 수 있다면. 꼬리도 흔들고 발바닥도 핥을 수 있을 텐데.

그런데 진짜로 나타난 거예요. 내 앞에. 아내가. 거짓말처럼. 내가 어디 있을지 뻔히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내 눈앞에 떡하니 나타난 거지. 아내가 내 손을 쥐어요. 그리고 말없이 나를 봐요. 아내 눈이 이렇게 말해요. 불쌍한 사람. 그래서 나는 아내 이마에 내 이마를 대고 울어요. 어린애처럼 코를 훌쩍이면서. 그때 난 깨달은 게 있어요. 아내 없이는 하루도 못 산다는 거. 젖도 못 뗀 갓난아이지. 엄마 없으면 죽어 버리게 생긴 아이지.


이 카톡형 문장, 기름 쫙 뺀 단문들의 연속체는 어쩌면 인터넷과 모바일 시대를 거치면서 점차 진화해 가는 한국어 문장의 한 중요한 미래로 제시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런 문장을 낳은 사회는 과연 어떠한 언어 심리학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모두가 어린아이처럼 짧게 분절해 말하는 사회는 인간을 어떤 괴물로 변화시키고 있는 것일까? 천운영 소설은 지금 우리들에게 그러한 물음의 징후로서 존재한다. 


3

이번 천운영 소설의 주제나 소재가 '엄마' 또는 '모성'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엉뚱한 다리를 더듬는 꼴이 되기 쉽다. 물론 표제작을 포함해 다섯 작품이나 엄마를 소재로 다루고 있는 데다, 천운영마저 「작가의 말」에서 '엄마'를 언급하면서 눙치고 있으니, 그렇게 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러나 '엄마'를 중심으로 보면 「젓가락 여자」와 「스물세 개의 눈동자」 두 작품이 배제되어 버리는 데다, 전체 작품이 너무 지나치게 식상해져 버린다. 욕망 극장의 단골 메뉴, '엘렉트라 콤플렉스'의 괜찮은 변주곡들쯤으로 읽히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들에는 그보다 훨씬 더 대담하면서도 대단한 운동이 있다. 감염과 변이의 병리학적 운동이라고 할 만한, 한 개체가 다른 개체를 만나 인간이 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괴물로 변신하는 과정에 대한 심오한 사유가 있다. 언젠가 시간을 들여 좀 더 세밀하게 분석해 보아야 알겠으나, 일단 짧게 정리하면, 카프카의 「변신」에서 그레고르 잠자가 아침에 일어나기 전, 그 한밤중에 일어난 형태 변이에 대한 임상 기록으로 읽힐 수 있을 어떤 문학적 사건이 부지불식간에 우리 곁에서 일어난 것이다.

관계를 표시하는 접속사들이 극도로 억제되면서 연결 고리를 잃고 흩어지는 문장들은 등장 인물들의 극단적 고립과 고독과 소외를 반영한다. 「엄마도 아시다시피」에 나오는 큰아들처럼,우리는 모두 '고아'인 것이고, 누군가 없이는 고아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집에 나오는 작품들에서는 그 호출의 자리가 근원적으로 비어 있거나, 어떤 때에는 그 호출이 사랑의 부름이 아니라 서로를 구속하는 관계의 강박으로 나타난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중요한 기초 단위로서의 가족이 끝내 파멸해 버렸음을 보여 주는 통렬한 부고장인 동시에 '가족 이후의 가치 구조(윤리)'를 전혀 생산적으로 만들어 내지 못한 한국 사회의 현재에 대한 가차 없는 심리적 보고서이다. 이런 사회에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유아적 퇴행을 거쳐 하나의 괴물로 변해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쩌면 천운영의 간결한 만연체 또는 만연한 간결체는 그러한 괴물들의 언어 심리학적 독백으로 읽힐 수도 있다.

어떤 사람도 '좋은 삶'을 살아갈 수 없을 때, 그런 사회에서 아등바등하는 인간들은 반드시 폭력의 구조를 내면화하게 된다는 점, 그 구조화된 심리적 폭력을 방치하면 한국 사회는 일찍이 홉스가 "인간은 다른 모든 인간에게 짐승이다."라고 말했던 그 원초적 사회로 퇴행해 버릴 것이라는 점, 이미 한국 사회는 그러한 사회 심리적 괴물들을 대량으로 배출하고 있다는 점 등, 천운영 소설은 심각한 사회면 기사이자 끔찍한 문학적 예언으로서, 한 문장의 판타지도 없이 우리에게 그러한 현실을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4

천운영은 말한다. 

"우리가 하는 일은 사람들 속에 숨은 짐승을 되살리고 거울을 들이미는 일"이라고. 

여기에는 비유가 전혀 없다. 

우리는 아마도 이미 짐승으로 변해 있거나 변해 가는 중이다. 그렇게 저 카프카적 묵시록의 세계가, 일절 유머도 없이, 한낱 알레고리도 없이, 가차 없는 현실로서 비로소 우리에게 도래한 것이다. 이것이 도착(倒錯)이 아니라 도착(到着)이라는 것, 이 사실이야말로 우리의 참된 불행이고, 동시에 천운영 소설이 이르른 높은 경지가 오늘 우리에게 폭로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