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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소설 / 희곡 읽기

고골, 『검찰관』(조주관 옮김, 민음사, 2005)을 읽다



명불허전. 몇 번을 읽어도 전혀 실망스럽지 않은 작품이 있다. 그중 하나가 고골의 대표작인『검찰관』(조주관 옮김, 민음사, 2005)이다. 이 격렬한 유머, 치열한 풍자,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어 가는 속물들의 연쇄, 작품의 인간들은 전혀 구원받을 수 없는 최악의 비천함 속에 빠져 있다. 한 치의 꺼리낌도 없이 고골은 우리를 인간의 속물성이 고스란히, 조금의 그늘도 없이 폭로되는 그 잔혹함 속으로 몰고 간다. 읽는 내내 정말로 즐거웠다. 조주관 선생의 해설은 이 작품의 미학적 성취와 쟁점 들을 고스란히 정리해서 보여 준다. 고골의 영원한 현재성은 근본적으로는 작가 본인에게서 나오겠지만, 어쩌면 이런 방대하면서도 정열이 넘치는 러시아 비평가들의 미학적 투쟁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 오늘날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도 정말 도움이 되었다.

스페인 여행 후 고전을 다시 읽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회사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에 속한 작품을 차례로 읽는 중이다. 『이방인』에 이어 두 번째로 고른 작품이다. 이유는 없다. 손에 잡히는 순서대로 읽으려 한다. 중간에 신간들도 읽어야 하기에 모두 읽으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지만 오십이 되기 전에는 독파할 결심이다. 아래에 『검찰관』을 읽으면서 밑줄쳐 두었던 것을 몇 가지 옮겨 적는다.



이 세상에 죄 없는 놈이 어디 있어. 이미 처음부터 하느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은 거야.

경우에 따라선 차라리 지혜가 없는 게 많은 것보다 나을 수도 있지.

그런 것이 설명하기 어려운 운명의 법칙이지. 학식 있는 인간이 주정뱅이 아니면 천하에 험상궂은 상통을 짓고 있으니 말이야.

하늘의 별들은 저마다 의미가 있고, 그 모든 걸 손바닥 위헤서 보듯이 설명해 주거든.

나는 식도락가요. 사실 인간이란 만족의 꽃을 꺾기 위해서 사는 것 아니겠소.

여보게, 그건 운명이 아니야. 운명은 칠면조처럼 변하는 거야.

그놈은 지금쯤 말방울을 울리며 길을 달려가겠지! 그리고 온 세상에 얘기하고 다니겠지.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물론이요, 삼류 작가라도 나타나면 그 엉터리 글쟁이 놈은 옳다구나 하고 그 이야기를 코미디에 써먹겠지. 바로 이게 화난단 말이야. 관직도 신분도 용서가 없단 말이야. 모두가 이를 훤히 드러내고 웃으며 박수 치겠지. 뭐가 우습나? 결국은 자기를 보고 웃는 게 아닌가......! 에잇, 당신들은! 이 엉터리 글쟁이 놈들을, 그냥! 우, 삼류 작가 놈들, 저주받을 자유주의자 놈들 같으니! 악마의 씨를 받은 놈들! 네놈들을 모조리 묶어다가 박살을 내고 말겠다. 그리고 악마의 옷 속에다 처넣고 말겠다! 악마의 모자 속에다 처넣고 말겠다......!


령된 인간은 모름지기 어떤 망령이나 허깨비, 아니 차라리 죄의식에서 오는 공포의 그림자라고 해야 할 어떤 존재에 의해 처벌받아 마땅하다. (벨린스키)

국가 관료주의란 본질적으로 위선적이기 때문에 진실을 은폐하기 위한 거짓을 쉽사리 허용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역사적 심리 상태로서 거짓말하는 습관이 유포되기 시작하면, 그것은 유아적 성격의 인물들을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위선과 거짓의 습성이 어떤 개인의 심리에 이식되었을 때 나타나는 것이 바로 흘레스타코프와 비슷한 부류의 인간형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인간형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사회와 문화 안에 엄청난 전제적 권위주의가 팽배해 있으며, 또한 사회적 소외 현상이 뚜렷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다양한 유형의 사회적 소외가 존재하는 곳에서만이 행위가 결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 가능하며, 이러한 소외가 전제될 때 자신을 속이거나 다른 사람을 기만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리 로트만, 조주관 해설에서 변형)

고골의 많은 작품에서 이야기의 화자가 자주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한 글쓰기 행위는 글자 그대로 '자기 자신을 새롭게 이름짓는(sam + zvat')' 행위다.

파불라(fabula)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가.'에 관심을 두고, 슈제트(siuzhet)는 '어떻게 사건이 일어나는가.'에 초점을 둔다.

“연극의 플롯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는 좋은 지위를 얻고, 자신의 번뜩이는 기지로 적수를 무색하게 만들며, 조소당하거나 웃음거리가 되는 자신에 대한 복수심이다. 지위와 돈, 그리고 훌륭한 결혼이야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사랑보다 더 의미가 크지 않은가?”(고골)

속물들은 추상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주제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관심하다. 특히 『검찰관』의 관리들에게서 나타나는 속물성은 어떠한 창조성도 결여한 채 그 사회의 가장 저열한 정신만을 모방하고 있는 자들의 속성이다. 관리들의 직권 남용과 거짓말과 자기 기만은 현실에서 자주 접하게 되는 속물적 현상이다.

흘레스타코프는 매우 생기발랄하다. 그러나 이 생기는 조용하고 야심만만한 열등감에 기초하여 구현된 무의미한 움직임이자 소동이다. 

속물적 인간은 모름지기 어떤 망령이나 허깨비, 아니 차라리 죄의식에서 오는 공포의 그림자라고 해야 할 어떤 존재에 의해 처벌받아 마땅하다.

다양한 민족의 가정에서 일어난 생활의 특징을 사소하고 이상스러운 일과 함께 묘사할 때, 그것은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 ....... 보드빌은 하층 생활, 즉 개인과 사회의 가족 생활을 풍자적으로 묘사하고 고급 드라마의 식탁에서 떨어진 파편들을 주워 모은다. 그것은 경구와 마찬가지로 풍자와 관련이 있다. 그것은 삶에 대해 격렬하게 소리 내어 웃지 않지만 삶에 얼굴을 찌푸린다....... 결국 그것은 어떤 일상 사건에 대한 즉흥시와 같다. (벨린스키)

[흘레스타코프는] 속임수가 의인화된 인물, 변화무쌍한 환영과 같은 인물이다. (고골)

흘레스타코프시치나는 낭만주의의 발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낭만주의의 소비에서 나온다. 고도로 발달한 문화에 기생충같이 빌붙어 살아가면서 그 문화를 단순화하는 흘레스타코프시치나는 특수한 환경을 필요로 한다. 흘레스타코프 같은 유형의 인물들은 주관적인 자의식이 넘치는 낭만주의자들이다. 일반적으로 사실주의 계열의 예술은 삶을 모방하는 데 반해, 낭만주의에서는 삶이 예술을 모방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낭만주의적 배경 아래 기묘한 형태를 띠고 탄생한 것이 흘레스타코프와 같은 부류의 허황되고, 상상과 현실의 세계가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의 집단인 것이다. 낭만주의 시대에 언어의 발달은 예술가에게는 창조적 상상력을 일깨운 반면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위대한 거짓말의 재능’을 촉진시켰다. 낭만주의는 야망의 심리학에도 변화를 주었다. 그 직접적인 동기는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이었다. 푸시킨의 “우리 모두는 나폴레옹과 같은 인물이 되려고 분투한다.”라는 구절은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 러시아 낭만주의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을 나폴레옹과 동일시하고자 했다.

전제주의는 언론을 억압하고, 통계 자료를 왜곡하고, 모든 종류의 공적 책임을 의례적인 거짓으로 변형시킨다. 

흘레스타코프 같은 인물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특징은 '행위'가 인격과의 통일체가 아니라 연극 무대에서의 주어진 '배역'이나 갈아입는 '옷'처럼 원하는 대로 '입을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의 인격과 행위는 분리되어 있으므로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이전의 행위는 마치 기억상실에 걸린 듯이 완벽하게 잊은 채, 요구되는 다른 행위로의 순간적이고 민첩한 변환이 가능하다.

흘레스타코프가 하는 거짓말의 기초는 자신의 인품에 대한 무한한 경멸이다. (중략) 그는 상상의 세계에서 자기 자신이기를 그만둘 수 있기 때문이고, 자기 자신을 제거하고 다른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며, 단수 일인칭을 단수 삼인칭으로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흘레스타코프는 '나'가 아닌 '그'만이 정말로 흥미로운 인물이라는 사실에 대단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를 비웃는 것은 자신을 비웃는 것이다. (고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