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4만 년 전, 독일 동남부 슈타델 동굴에서 조각상 하나가 만들어졌다. 사자 머리와 인간 몸을 한 조각상으로, 재료는 매머드 엄니였다. 공들여 만들어진 이 조각상은 인간과 사자와 매머드의 힘을 하나로 합치려 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사람과 세계를 하나로 잇고, 인간과 동물을 넘나들면서 더 나은 삶을 이룩하려는 마법적 사고방식이 이로부터 비롯했다. 이는 곧 문명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마법의 역사』(시공사, 2025)에서 크리스 고드슨 옥스퍼드대 인류학과 교수는 인류 정신이 삼중나선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종교, 과학, 마법이다. 종교가 인간과 신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과학이 물리적 현상에 관한 객관적 이해를 추구한다면, 마법은 인간과 우주의 상호연결을 강조한다.
마법은 우주를 인간화한다. 점술, 연금술, 출산 의식, 성인식, 장례식, 제사 등 마법 관행을 통해 인간은 하늘의 일에 참여하고, 하늘은 인간 삶에 영향을 끼친다. 사람들은 점을 쳐서 천체 운행이 삶에 미치는 작용을 알아내고, 영혼을 동물과 연결해서 그들을 길들일 힘을 구했다. 만약 당신이 개나 고양이를 한 가족으로 여기거나, 인형 같은 무생물에 이름을 붙이고 말을 건넬 때, 당신은 마법을 행하는 중이다.
이 책은 폭넓은 현장 조사와 다채로운 연구 성과를 결합해 인류사에서 마법의 여정을 생생히 그려낸다. 빙하기 유럽의 동굴 예술에서 출발해 저자는 오리엔트와 이집트, 그리스와 로마와 유대, 대초원과 중국,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와 호주 등 전 지구를 넘나들면서 점성술, 운세, 신탁, 농경의례, 사냥 마법, 문신술, 부적술, 비약술, 연금술 등 마법의 다양한 형태를 보여준다.
우리는 흔히 마법에서 종교로, 종교에서 과학으로 인류 정신이 진보했다고 믿는다. 그에 따르면, 근대는 탈마법화 시대(베버)이다. 이성을 앞세워 마법을 낡고 무력한 것으로 폄훼하고, 과학의 지배력을 예찬한다. 마녀사냥과 식민주의는 현대인의 사유에서 마법을 쫓아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과학과 마찬가지로 마법도 세계의 작동을 이해하고, 거기서 혜택을 누릴 방법을 찾는다. 오랫동안 인류는 마법과 과학을 적절히 섞어서 사고해 왔다. 가령, 환자가 오면 주술사(마녀)는 오랜 관찰과 경험을 통해 찾아낸 약초를 먹이거나, 마취나 수술 같은 의학적 치료법을 활용한다.
그러나 과학은 하필 나만 왜 병에 걸렸는지, 의사도 손 놓은 상태에서 어떡하면 내가 죽음을 이겨낼 수 있는지에 답하지 않는다. 이럴 때 ‘나’에겐 우주의 흐름을 바꿔 저주를 무찌르고 하늘의 힘을 빌려 기적을 일으킬 비법이 필요하다. 제도 종교가 널리 자리 잡고 과학이 장악한 시대인데도, 미국인의 4분의 3이 여전히 마법적 힘을 믿는 이유일 테다. 고통이 우리 삶을 틀어쥐고 있는 한, 마법을 인간 사유에서 쫓아낼 방법은 없다.
마법은 크게 초월, 변형, 거래로 나뉜다.
초월 마법은 우주는 인간에게 영향을 주나, 인간은 우주에 영향을 미칠 수 없을 때 행한다. 대표적 마법은 점성술이다. 점성술은 우주의 운행을 살피고 이해해서 그에 적절히 반응하는 길을 알려준다.
변형 마법은 우주의 작동에 끼어들어 이를 유용하게 바꿀 때 행한다. 대표적 마법은 연금술이다. 연금술은 납을 금으로 바꾸고, 물을 불로의 묘약으로 바꾸며, 문신을 새겨 동식물의 힘을 몸에 깃들이는 법을 가르친다.
거래 마법은 우주와 교섭해 원하는 걸 얻으려 할 때 행한다. 대표적 마법은 제사다. 인류는 제사를 지내서 조상의 힘을 빌리거나, 희생을 바쳐 신탁을 알아내는 법을 알려준다.
원시 샤머니즘에서 현대 생태주의까지 만물이 연결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믿는 모든 사유는 마법적이다. 마법은 인간 행동을 우주의 운행과 이어주고, 우주의 힘을 불러들여 새로운 삶을 창조하려는 의지이자 행위이다.
그러므로 경쟁, 차별, 폭력, 약탈, 전쟁으로 위험과 불안이 넘쳐날 때가 마법의 번성기였다. 고통받는 약자나 수탈당하는 빈자일수록 다양한 마법을 행했다. 그들은 압제를 물리치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했다.
저자에 따르면, 오늘날 인류는 마법적 사고방식을 되찾아야 한다. 인간과 세계를 분리하는 과학적 사고방식은 다시 없을 풍요를 가져왔으나, 자연에 대한 파괴와 착취를 거듭하다 끝내 기후 위기와 생태 재앙을 일으키면서 지속가능성을 잃었기 때문이다.
마법적 사고방식은 인간과 자연이 교감하는 법을 돌려줌으로써 인류가 전혀 다른 세상으로 나아갈 길을 열어준다. 이윤이 아니라 공동선을 위한 경제, 더 나은 세계를 후세에 넘겨주겠다는 돌봄의 윤리와 후견의 의무, 자기 배려와 타자 존중 등 마법은 과학에 영혼을 돌려줌으로써 더불어 상생하는 삶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우리가 과학의 성과를 계승하면서도, 새삼 인류 정신의 원초적 형태인 마법의 역사를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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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답니다.
이번 주 문화일보 서평입니다.
현대 철학의 인류학적 전회에 바탕을 두고, 약해졌으나 절대 없애 버릴 수 없는 마법적 사고방식을 중심으로 인류의 역사를 살핀 책입니다.
마법, 종교, 과학으로 이어지는 단선론적 서술 대신, 이들을 병치해 가면서 서술하는 내용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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