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삶에 실망할 때가 있다. 배고파도 먹을 게 없고, 쉬어야 하는데 누울 곳 없는 극단적 결핍은 우리를 좌절시킨다. 아픈데 돌봐줄 사람이 없고, 외로운데 대화할 사람이 없는 고립은 우리를 무너뜨린다. 거짓이 진실을 억누르고, 폭압이 자유를 위협하고, 권력이 제 입맛대로 법을 농단하는 세상은 우리를 실망에 빠뜨린다. 이럴 때 사람들 입에선 한탄이 저절로 쏟아진다. “이건 사는 게 아니에요.”
『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문학과지성사, 2024)에서 주디스 버틀러와 프레데리크 보름스는 갈수록 우리를 절망으로 몰아넣는 세계에서 위태로운 삶에서 벗어나 살 만한 삶을 이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이약한다.
사는 것 같지 않은데 목숨만 이어가는 듯한 느낌이 만연한 세상, “살 만하지 않은 삶에 붙잡힌” 듯한 모순된 기분은 우리에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준다. 이런 삶은 우리 안에서 참지 못할 정도로 강렬한 수치심을 일으키는 한편, 이를 극복하고 싶은 의지를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이건 사는 게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순간은 이런 나쁜 삶을 더는 내버려 두면 안 된다는 정치적・사회적 각성의 순간이고, 그 삶을 바로잡을 절박함을 느끼는 순간이다.
다른 삶을 생각할 때, 인간은 비로소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면서 삶의 조건을 따지기 시작한다.
버틀러에 따르면, 한 사회가 생명을 지속하고 활동을 이어가기 위해 필요한 것을 보장할 때, 사람들은 살 만하다고 느낀다. 특히, 배제된 약자들, 위태로운 몸들이 고통과 질병, 폭력과 상해의 위협에 빠지지 않도록 사회적 인정과 보호를 제공해야 한다. “당신의 삶이 살 만하지 않고는 내 삶도 살 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옥하고 충만한 삶은 위태로움을 제거하려는 돌봄의 의지가 정치의 최전선에 놓인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보름스 역시 상호 돌봄을 기초로 현재 사회관계와 정치 질서를 다시 상상한다. “돌봄 없는 삶은 생존이 위태로워진 몸, 손상된 주체성, 허물어진 정의의 원칙, 세상에 대한 관심의 차단”을 낳는다. 죽지 못해 사는 이런 비참한 세상에서 중요한 건 “살 만하지 않은 삶에 맞서 살 만한 삶을 돌보는 일”이다. 죽음과 싸워 생명을 불리고, 폭력과 침해에 맞서 애착과 친밀을 늘리면서, 정치적・제도적으로 돌봄의 실천을 뒷받침하는 사회를 이룩해야 하는 것이다.
두 사람의 관심은 결국 민주주의로 향한다. 인간의 상호 의존을 인정하고 돌봄을 장려하며 개인에 대한 폭력과 침해를 막아줄 수 있는 유일한 정치 체제가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적대와 대립이 만연한 사회에서 버틀러는 경고한다. “우리가 의존하는 구조가 실패하면, 우리도 실패하고 쓰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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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답니다.
<매일경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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