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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서 가장 오래된 목욕에 대한 기록은 삼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유사’에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를 동천(東泉)에 씻겼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음력 3월 3일 삼짇날에는 ‘계옥’이라는 목욕 풍습이 있었다. 고대 한국인들은 목욕을 죄를 씻는 성스러운 행위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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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사람들은 목욕으로 하루를 시작했을 만큼 목욕을 좋아했다. 이들은 성별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시냇물에서 함께 섞여 목욕을 즐겼다. 1123년 고려를 다녀온 송나라 사신 서긍의 『고려도경』에 고려시대 목욕 풍습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남자와 여자의 분별도 없고, 의관을 언덕에 놓고 물굽이에 따라 몸을 벌거벗되 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왕과 귀족들은 온천을 자주 찾았는데, 선종 5년(1088)에는 관리가 병 치료를 위해 온천욕을 하러 갈 경우 그 여정의 거리에 따라 휴가를 주는 제도도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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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국가였던 조선시대 사람들은 목욕을 사적이고 경건한 행위로 여겨, 타인에게 알몸을 보이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조선을 찾은 명나라 사신 동월은 서긍과 전혀 다른 기록을 남긴다. “시내에서 남자와 함께 목욕하고, 역에서 일하는 이들이 모두 과부라고 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상당히 해괴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미 다 고쳐 없어진 것을 알았다.”
고려의 ‘온천 휴가’ 제도는 조선 시대에도 이어졌다. 왕들도 온천을 사랑했으나, 온천 지역 백성들은 전혀 반기지 않았다. 온천 행차에 나선 왕과 신하들을 접대하느라, 밭을 임시 병영으로 내놓으면 한 해 농사를 망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온천을 즐겼던 세종이 한양과 인접한 부평에 온천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여러 차례 사람들을 동원해 땅을 팠으나, 고을 노인들과 향리들은 온천 위치를 알려주기보다 차라리 형벌을 받겠다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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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조일수호조약 체결로 일본인이 조선에 정착하면서 공중목욕탕을 비롯한 목욕 문화도 함께 들어왔다. 그러나 가옥 구조상 조선인들은 전신 목욕을 할 여건이 되지 않아 방에 대야를 놓고 부분적으로 몸을 씻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일제는 ‘불결한 조선인’이라는 프레임을 씌워서 조선인을 야만인으로 몰아갔다.
일제 강점기에 목욕탕은 일본이 서양식 제국주의적 위생관을 내세워 한복 입은 조선인의 공중탕 출입을 허가하지 않는 등 차별 정책을 폈다. 당시 신문은 ‘탕에 들어가기 전에 불결한 부분 씻기’ ‘물속에서 때 밀지 말기’ ‘소변 보지 말기’ ‘마음대로 탕에 찬물 섞지 말기’ 등 목욕탕 이용 예절을 공중탕에 익숙하지 않은 조선인 독자들에게 안내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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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공중목욕탕은 급속히 늘어났다. 현금 거래가 주를 이뤄 부도의 위험이 없고, 적당한 시설을 갖추고 성실히 운영하면 가족이 안정적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는 공중보건을 근거로 대중목욕탕 보급을 격려했고, 이에 1960년 146곳이었던 서울의 공중목욕탕은 1985년 1768곳으로 급증했다. 특히, 1960년대 들어 비누 보급이 대중화되었고, 1970년대엔 이태리타월이 발명되어 등장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 목욕탕을 찾아 때를 미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이태리타월, 즉 ‘때수건’은 우리만의 독특한 목욕 문화의 부산물이다. 이 때수건의 원단을 만드는 기계가 ‘이태리식 연사기’였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때수건은 워낙 인기가 있어 특허 만료 뒤 타사에서 생산된 제품도 모두 ‘이태리타월’이라 불릴 정도로 고유명사가 됐다. 한국 목욕 문화에 반한 외국인들에게는 인기 관광상품까지 됐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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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성하던 목욕탕은 1990년대 들어 위축되기 시작했다. 온수가 나오는 가스보일러와 욕조가 설치된 화장실이 집집마다 생기면서 점차 설 자리를 잃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은 결정적 타격을 주었다. 2020~2022년에만 전국에서 목욕탕 730여 곳이 폐업했다. 이에 목욕탕을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세대가 등장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욕탕인 대전의 유성호텔 대온탕은 2024년 3월 문을 닫았다.
목욕탕 접근성은 양극화되고 있다. 목욕부터 마사지와 피부관리까지 제공하는 고급 목욕 관리실은 늘어나지만, 대중목욕탕을 중심으로 형성된 느슨한 공동체는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수도권 밖은 인구 감소로 목욕탕이 문을 닫고 있다. 그러나 고시원, 쪽방촌, 옥탑방에 사는 주거 취약계층에겐 여전히 목욕탕이 필요하다. 일부 지방자치단체들이 직접 목욕탕 운영에 나선 이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