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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책 읽기

냉전과 한국전쟁

미국과 소련은 모두 유럽계에서 파생했으나, 19세기 말 공통의 적 유럽의 팽창을 저지하는 데에서 그 마음이 일치했고,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냉전이 전개되는 내내 그 공통점을 유지했다. 『냉전』(서해문집)에서 오드 아르네 베스타 예일대 교수는 냉전을 “미국과 러시아가 점차 국제적 사명감을 갖춘 강력한 제국으로 전환한 과정”이자 “자본주의와 그 비판자 사이의 이데올로기적 분열이 첨예화한 과정”으로 정의한다.

냉전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부터 소련이 붕괴한 1991년까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공산주의) 진영 간의 이데올로기 대결을 기반으로 형성된 국제 질서를 말한다. 힘과 폭력이 국제관계의 기준이 된 이 차가운 전쟁 시기는 유럽 제국주의의 몰락을 가져오는 한편, 두 초강대국이 지배하는 선악 이분법적 세계 질서를 만들어 냈다. 

저자는 냉전의 기원을 1898년 미국이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승리해서 쿠바·푸에르토리코·필리핀·괌을 차지한 데서 찾는다. 그 직후에 선출된 윌리엄 태프트 대통령(1909~1913년 재임)은 해외 투자·대출로 대외 영향력을 확대하는 ‘달러외교’를 펼치며 본격적으로 글로벌 강대국을 지향하기 시작했다(태프트는 전쟁장관 시절인 1905년 미국의 필리핀 지배권과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권을 상호 승인하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었다). 

20세기에 들어 두 차례 벌어진 세계대전은 유럽의 세계 지배에 종말을 알렸다. 20세기 들어 미국은 경제적 영향력과 독립혁명을 이끈 공화주의 정신의 전 세계적 확산을 도모했다. 처음엔 주저하다 결국 1, 2차 대전에 참전한 미국은 패권국가로 올라섰다. 이런 ‘팽창국가’ 미국이 전후 공산혁명의 전 지구적 수출을 꾀한 소련에 맞선 것이 냉전이라는 설명이다. 소련은 이미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반제국주의·반식민주의 세력의 구심점이 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소련과 미국은 서로 연합해서 독일, 일본과 싸운 연합국이었다. 1941년 6월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고, 같은 해 12월 일본이 미국을 공격하자, 거대 영토와 인구를 거느린 두 강대국이 연합해서 이를 무찌르려 한 것이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이들은 갈라서 본격적으로 체제 경쟁에 나섰다. 공산주의를 내세운 소련과 자본주의를 내세운 미국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 전 세계 곳곳에서 세력 확대에 나섰고,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국제 정치의 중심은 프랑스와 영국, 독일과 일본로부터 세계 패권을 거머쥔 미국과 이에 대항하는 소련의 대결로 넘어갔다. 

두 나라 모두 자국의 세계 지배에 필연적 이유가 있고, 자국에 이를 달성할 소명이 있다고 믿었다. 19세기 말, 근대화에 따라 전 세계에서 종교와 신앙의 힘이 약화되었는데도, 두 나라 사람들은 여전히 종교를 자기 삶의 중심으로 삼았다. 미국에선 복음주의 기독교가, 러시아에선 정교가 세력을 떨쳤다. 심지어 자본주의나 사회주의조차도 이들의 힘을 억누를 수 없었다. 두 나라에선 정교분리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 정치 행위에 끝없이 종교적 영감을 불어넣은 것이다.

이 때문에 유럽계 출신인 두 나라 엘리트는 유럽의 제국주의적 역사의식을 이어받아, 비유럽을 유럽인에 가깝게 바꾸는 게 그들 영혼의 구제라고 믿었다. 이들은 유럽을 세계화하는 데, 즉 태평양까지 유럽을 확대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을 수행한다고 믿은 까닭이다.

한국전쟁은 패권 경쟁에 돌입한 두 나라가 최초로 충돌한 전쟁이자, 사실상 제3차 세계대전에 가까운 전쟁이다.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은 아마 냉전에서 단일 사건으로 가장 커다란 재앙”이자 “가장 소름 끼치는 냉전의 충돌을 상징”한다. 전쟁이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한국인 사이의 격렬한 이념 대립과 초강대국의 개입을 가능케 한 냉전의 틀” 때문이다. 저자는 그 기원을 19세기 말 중국의 힘이 무너진 동아시아 공간을 20세기 들어 이념 대립이 덮친 데서 찾는다.

책에 따르면, 분단과 한국전쟁은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미국은 1947년 중반까지 모스크바와 합의해 통일과 총선거를 위한 길을 닦을 수 있다고 기대했다. 한반도 분단이 굳어지고, 끝내 전쟁까지 나아간 것은 이승만과 김일성의 권력욕 탓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자기 통치로 한반도를 통일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어떤 계획에도 완강히 동의하지 않았다.”

김일성과 이승만은 모두 전쟁을 원했고, 이 때문에 1948년 말까지 38선 곳곳에서 남북의 잦은 충돌로 긴장감이 감돌았으나, 미국과 소련 모두 전쟁엔 관심이 없었다. 미국은 현상 유지에 만족했고, 소련은 중국과 유럽의 공산화에 골몰해 있었다.

그러나 상황이 조금씩 변해갔다. 중국 공산당이 장제스를 몰아내고 중국 본토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면서 미국이 아시아 대륙 본토에 개입하길 꺼린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미국은 장제스에게 보급품 등 물적 지원을 했지만, 군대를 파견하진 않았다. 게다가 스탈린이 집중한 베를린 봉쇄 조치(소련이 서베를린에 대해 단행한 전면적 물자공급 봉쇄 조치)가 미국과 영국이 원조에 나서면서 1년 만에 물거품이 돼 버리자 낙담한 스탈린은 아시아로 시선을 돌렸다.

때마침 ‘북한과 남한의 힘의 균형이 공산당에 유리하다’라는 북한 주재 소련 대사의 보고가 스탈린 귀에 들어갔다.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1950년 6월에 진행할 구체적 남한 공격 방안을 2~3개가량 제출했고, 스탈린은 최종적으로 이를 승인했다. 공격 계획은 소련인이 주로 짰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을 상대로 벌인 고도의 기동전이 이들의 기본 전술이었다.

그러나 소련과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워싱턴의 의도를 오판했다. 미국은 패전 후 일본에서 세력을 늘려가는 좌파를 물리치고 동맹에 도움이 되는 자유주의 체제를 만들려 했다. 그래서 다시 한반도가 중요해졌다. 한반도를 교두보 삼아야 공산 중국에 대항하고, 일본을 방어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일본 못지않게 중요한 냉전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것이다.

1950년 6월, 북한군이 38선을 넘어오자, 트루먼은 “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한층 더 축소하고 지구 차원에서 미국과 동맹 세력의 의지를 시험하기 위해 공산주의가 벌인 전면적인 침략사건”으로 판단하고, 곧바로 전쟁에 뛰어들었다. 두 세력의 힘겨루기 속에 전쟁은 3년이나 끌었고, 한반도는 극도로 황폐해졌다.

“(한국전쟁은) 관련한 모든 나라에 쓸모없고 끔찍한 전쟁이었다. 하지만 남북한 자체에 미친 영향은 더욱 나빴다. 나라 전체가 폐허가 되었다. 350만 명이 전쟁으로 사망하거나 부상당했다. (중략) 한국인에게 전쟁은 민족 재앙이었고, 전쟁이 남긴 상흔은 여전히 치유되지 않았으며, 그 비참함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더욱이 한국 전쟁은 냉전을 “전 지구적 규모로 강화하고 군사화”했고, 미·소간 군비경쟁을 촉발했다. 냉전은 브라질을 비롯한 남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좌우 세력의 장구한 대치와 상호증오, 상대의 악마화에서도 찾을 수 있다. 냉전은 2차 대전 뒤 독립과정에서 종교·정체성 문제로 분단되고 서로 싸운 인도와 파키스탄에도 영향을 끼쳤다. 소련과 가까웠던 네루 총리의 인도와 미국과 준동맹 관계를 유지했던 파키스탄은 냉전의 또 다른 장을 형성했다. 중동에선 잔존 제국주의의 명백한 위협을 보여준 1956년 수에즈 위기 이후 상당수 아랍국가가 소련에 밀착하면서 냉전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지금도 냉전의 일그러진 사고와 관념이 국제정치는 물론 수많은 나라의 국내 정치, 내부 갈등, 무한경쟁 체제 등에도 남아 있다. 힘과 폭력에 의한 문제 해결 추구, 경쟁적·대결적 사고방식, ‘나는 선이고 상대는 악’이란 이분법적 사고와 신념체계가 그것이다. 특히 이분법에 빠지면 세상을 아군과 적군, 이쪽과 저쪽으로 구분해 서로 증오하고 갈등하며 상대를 말살할 때까지 자원을 갈아 넣고 끝없이 싸우게 된다며 냉전의 최대 해악으로 꼽았다. 도덕적 자기 확신, 상대와의 대화 회피, 군사적 해법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의존이 이분법의 배경. 미국이 베트남이나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인 전쟁이 바로 그런 사례다. 사회적 분열과 갈등의 고질화도 냉전의 표상인 이념 대결의 연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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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문서평을 정리한 글이다. 

 

 

오드 아르네 베스타, 『냉전』, 유강은 옮김(서해문집,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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