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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책 읽기

세계 목욕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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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목욕의 역사적 증거는 인더스 문명의 유적지 모헨조다로에서 나타난다. 기원전 3000년에 세워진 이 도시 유적에서는 상하수도 시설과 목욕탕의 흔적이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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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은 목욕을 체액(혈액, 점액, 황담액, 흑담액)의 균형을 맞춰주는 의료 처치로 여겨 환영했다. 그리스인들은 건강을 위해 냉온수, 증기로 목욕했고, 로마인들은 거대한 공중 목욕탕을 매일 찾아 사교 활동과 함게 식사, 마사지 등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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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서 공중목욕탕은 ‘황제의 성적표’라 불렸다. 신분에 상관없이 로마 시민 모두가 이용할 수 있었기에 사회 통합 기능을 해냈다. 거대한 목욕탕은 황제가 정치를 잘하고 시민들이 행복한 삶을 누린다는 상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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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인들은 여가와 쾌락의 장소이자 남녀 혼욕, 매춘 등이 이루어졌던 공중목욕탕을 ‘죄악의 공간’이라 봤다. 이들은 신체의 깨끗함보다 영혼의 정결함을 우선시했기에, 수도승과 성인들은 씻지 않는 고행을 통해 영혼의 성스러움을 증명하려 했다. 목욕에 따른 신체적 쾌락을 포기하는 이러한 고행을 알로우시아(alousia)라고 했다. ‘씻지 않은 상태’라는 뜻이었다. 목욕 문화가 가장 발달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에 살았던 아그네스 성인은 박해로 사망하는 13세까지 단 한 번도 몸을 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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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인들 역시 목욕을 꺼렸다. 열린 모공을 통해 나쁜 공기가 몸에 들어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공중목욕탕은 기독교 영향 아래에서 사라졌다. 공중목욕탕이 다시 등장한 것은 십자군 전쟁 이후였다. 오리엔트에 갔던 병사들이 이슬람식 목욕을 경험하고 증기식 목욕탕(사우나)을 지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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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식 목욕을 ‘하맘’이라고 한다. 흔히  ‘터키탕’으로 알려진 이 목욕 방식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지 않는다. 이슬람에선 고인 물을 불결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이를 대신해 이슬람에선 증기로 가득 찬 방에 앉아서 몸에 물을 끼얹어 때를 불린 후, 양털이나 염소털로 만든 수건으로 벗겨내는 방법을 택했다. 율법을 어기지 않고도 청결을 유지하기 위해서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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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중반 흑사병이 창궐하며 유럽의 공중 목욕탕은 전염병의 온상으로 여겨져 사라졌다. 그러다 17세기 계몽주의 발달과 함께 청결이 중시되면서 되살아났다. 19세기 후반 런던을 배경으로 한 셜록 홈스 시리즈의 단편 ‘거물급 의뢰인’에서 왓슨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홈스와 나, 둘 다 터키탕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당시 영국에서 ‘터키탕’은 상류층과 중산층이 여가와 휴식을 즐기는 곳이었다. 목욕만이 아니라 마사지, 아로마세러피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처럼 목욕은 종교, 사회상, 과학의 발전 수준이 모두 반영된 복합적인 행위였다.

 

이인혜, 『씻는다는 것의 역사』(현암사,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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