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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소설 / 희곡 읽기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최순덕 성령 충만기』와 새로운 이야기꾼의 탄생

《경향신문》에 연재 중인 ‘21세기 고전’. 이번엔 이기호 소설집 『최순덕 성령 충만기』를 다루었습니다. 이 작가는 화법의 마술사와 같습니다. 다채로운 화법을 통해서 자본주의 아래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지만 전락을 피할 수 없는 우리 삶의 모습을 그야말로 ‘재미나게’ 이야기하는 재능이 있습니다. 이문구, 황석영, 성석제의 뒤를 잇는 이야기꾼의 탄생이라고 불러도 좋겠지요.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최순덕 성령 충만기』와 새로운 이야기꾼의 탄생


한국문학에서 ‘입담’이란 한 소설가가 이룩한 어떤 신화를 상징한다. 황석영, 성석제 등의 이름 앞에 붙은 ‘구라장이’ 또는 ‘이야기꾼’이라는 칭호는 독자 대중의 심장에 열광을 불러일으키는 유혹의 북소리이자, 문장들의 건조한 나열에 불과한 소설에 입말의 생생함을 불어넣었다는 미학적 성취의 표지로 기능한다.

자본주의가 ‘이야기’ 전달의 전제 조건인 공동체 시공간을 사람들로부터 서서히 그리고 철저히 박탈해 가는 상황에서, ‘문자의 예술가’인 소설가가 ‘목소리의 예술가’인 이야기꾼의 자리를 승계하는 일이 도무지 가당키나 한지는 일단 접어두도록 하자. 황석영이 공동체 경험에 뿌리를 여전히 내리고 사는 존재들로부터 근대화의 비인간적 소외에 저항하는 언어의 마당을 구축했으며, 성석제가 자본의 운동에 떠밀리다 못해서 기어이 ‘투명인간’으로 변해 버린 이들의 삶을 선연히 뭉쳐두지 않았는가.

21세기 한국문학에서 ‘이야기꾼’의 칭호를 이어받을 작가를 한 사람 꼽으라면 누구나 이기호를 떠올릴 것이다. 다채로운 입말 화법으로 무장한 『최순덕 성령 충만기』(문학과지성사, 2004)를 깃발처럼 들고 처음 등장했을 때, 그의 소설을 읽던 이들은 움켜쥔 배에서 어느새 배꼽이 떨어져 사라진 것을 속절없이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비틀기의 미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른의 각종 말투를 흉내 냄으로써 웃음을 터트리는 악동 이야기꾼처럼, 성서의 말투를 가져온 「최순덕 성령 충만기」, 대중가요에서 랩의 말투를 빌려온 「버니」, 피의자 조서 형식을 재활용한 「햄릿 포에버」, 요리 방송의 진행 멘트를 탈취한 「누구나 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 자기소개서 양식을 반입한 「옆에서 본 저 고백은」 등 이기호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화법을 가져다쓰면서 언어의 놀이꾼으로서 자기 재능을 드러낸다.

“내 나이 열아홉, 세상이 좆같다는 걸 충분히 알 나이, 사람이 어떻게 죽는지, 잘난 놈은 어떻게 사는지, 못난 놈은 어떻게 되는지, 충분히 알 나이, 돈이 왜 좋은지, 사람은 왜 때리는 걸 좋아하는지, 몰려다니는 게 좋다는 걸, 혼자 남으면 무섭다는 걸, 모두 다 아는 나이.”

작가의 진짜 재능은 소설의 내용이 아니라 화법에 있음을 몰랐다면 아마도 이러한 문장은 절대로 쓰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창작 ‘방법’을 의식하는 패기에 찬 자의식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작가적 재능은 또한 얼마나 드문가. 미학을 성취하지 못한 채 소설가 대부분이 ‘작가’가 아니라 ‘작자’에 머무는 것은 이 때문 아닌가. 세상을 풍자하고 조롱하면서 흥미와 재미를 발전하는 동시에 자본의 주변부로 밀려난 변두리 인생의 기쁨과 슬픔을 기록할 줄 아는 이기호의 기이한 재주에 문단이 열광한 것은 그저 당연할 뿐이다.

하지만 랩의 리듬을 타고 빠르게 전진하는 즐거운 문장에 취하다 보면, “혼자 남으면 무섭다는 걸”이라는 섬뜩한 우울의 틈입을 놓치기 쉽다. 이기호가 우리의 비루한 삶을 기록하는 방법은 은밀하고 조용하며 섬세하다. 조증에 가까울 정도로 산란하는 명랑한 화법은, 살짝만 건드려도 곧바로 주르륵 물이 흘러내릴 것 같은 울증의 삶을, 그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이들의 소외와 공포를 더욱 선명하게 기록하기 위한 것이다.

일찍이 호메로스는 쏟아지는 화살과 분투하는 전사들의 함성 한가운데 모든 것을 잊은 채 침묵하는 한 전사의 시체를 놓아둠으로써, 전쟁의 비참함과 무의미를 가장 격렬한 형태로 환기하는 법을 보여주었다. 꼭 그처럼 이기호 역시 희극을 통해 비극을 증폭하는 신과 같은 화법을 이룩한다.

“아담이 (중략) 한 번 지옥에 빠진 사람들은 영원히 그 지옥 안에서만 머물게 되는 건가요 (중략) 하고 물으니 순덕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더라 이에 아담이 다시 집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며 가로되 어쩌면 난 말이에요 이미 심판을 받은 사람일지도 몰라요 내가 밟고 있는 이 땅이 지옥이라는 생각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중략) 이미 심판을 받은 사람들은 무엇을 하면서 견뎌야 할까요”

이기호는 웃음의 책략을 펼쳐 독자들을 세상 질서의 이면에 있는 불한당적 재미에 빠져들게 하고, 거기에서 반전을 일으켜 독자들에게 기이한 아이러니를 경험시킨 후, 결국에 그 전체를 한 걸음 떨어져서 ‘불현듯’ 관조하도록 만든다. 「최순덕 성령 충만기」에서 바바리맨 ‘아담’의 입으로부터 쏟아지는 이 진지한 농담은, 사실 자본이 배후조종하는 폭력적 질서의 파리지옥에 빠진 벌레 같은 존재들이 벌이는 필사적이지만 불가능한 탈출의 역설을 드러낸다. “이미 심판을 받은 사람들은 무엇을 하면서 견뎌야 할까요”라니. 그렇게 해서 ‘아담’과 자신의 삶이 한없이 겹쳐지는 이 전락을 깨닫는 순간, 독자들은 웃다가 마침내 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웃음을 통해 기어이 울음을 빚어내는 작가의 재능을 어찌 무섭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