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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은 병이 아니다 《조선일보》 기사를 보니 일본에서 시모주 아키코(下重曉子)라는 전직 유명 아나운서가 쓴 『가족이라는 병』이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모양이다. 내용은 아래와 같단다. "가족은 가장 가까운 존재라고 하지만, 사실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부모와 자식이 서로에게 기대기보다 독립적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면서 서로를 정확하고 깊이 있게 이해해야 한다. 그러지도 못하면서 입만 열면 가족 얘기를 하고, 연하장에 가족 사진을 첨부하는 건 "행복을 강매하는 것"이 아니냐고 독자에게 묻는다. 때때로 이런 책이 많이 팔리는 것을 볼 때마다 괜스레 슬퍼진다. 또 이런 책을 수입해 보겠다고 편집자들이 달려들까 봐 겁이 난다. 기자의 요약이 사실이라면 이 책의 저자는 사랑에 대한 기초적인 ..
편집자, 지적혁명 만들어내는 지성의 프로모터(문화일보 서평) “편집자, 지적혁명 만들어내는 지성의 프로모터” 편집자는 지식 또는 사상의 구조에서 잊힌 좌표로 표시된다. 그것은 근대 출판에서 지적 재산권의 소유자, 즉 사상의 주인을 표시하기 위한 구조적 필연성의 결과이자 주체의 결단, 즉 스스로 대중의 눈밖에 있기를 바랐던 편집자들의 자기규정 탓이다. 근대란 계약을 통해서 움직이는 사회이고, 서명된 이름을 통해서만 온전히 자신을 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책공장 베네치아』와 『사상으로서의 편집자』는 저자의 그림자 뒤에 숨어 있던 존재인 ‘편집자’를 전면으로 호출한다. 물론 두 책의 층위는 다르다. 『책공장 베네치아』는 사학자의 저술답게 자료를 조직해서 베네치아라는 공간에서 일어난 서적과 출판의 역사를 엄밀히 재구성하는 데 치중한 반면, 『사상으로서의 편집자』는 편집..
봄날, 새로운 도서관을 맞이하며(세계일보 칼럼) 봄날, 새로운 도서관을 맞이하며 농부들의 희망 토종 ‘씨앗도서관’전국으로 퍼져 우리 씨앗 지키길 들빛은 아직 눈으로 덮여 희기만 한데, 마음은 봄으로 푸르게 부풀어 오른다. 하지만 꽃을 시샘하는 바람이 코끝을 스칠 때마다 목이 절로 옷깃 속으로 들어간다. 겨우내 한가롭던 시골 마을이 서서히 기지개를 켠다. 올해 봄부터는 텃밭을 일구려 하기에 생각이 분주하다. 피부에 와 닿는 공기 한 줄기 한 줄기, 매일 조금씩 풀려 가는 땅의 움직임에 생기가 느껴져 예사롭지만은 않다. 지난 늦가을에 심은 마늘과 양파의 땅속 소식도 궁금하다. 특히 마늘은 마을 할머니 한 분이 오랫동안 애지중지 대물림한 토종 씨마늘이어서, 부엽을 덮지 않은 내 게으름 탓으로 매서운 추위에 혹여 상하지나 않았을지 애를 졸인다. 만약에 이 마..
글쓰기에 대하여(헤르만 헤세) 작가들에게 글쓰기란 언제나 멋지고 흥미진진한 일이다. 그것은 일엽편주에 이야기 한 편을 싣고 바다 한가운데로 나아가는 것 혹은 우주 속에서 홀로 비행하는 것에 비견된다. 적절한 단 어 하나를 찾아내고 가능한 말 세 개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짓고 있는 문장 전체를 감정과 귀에서 잃지 않는 것, 문장을 다듬고 자신이 선택한 구성 방식을 실현하고 구조물의 나사를 조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장 전체 혹은 책 전체의 조화와 균형을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부단히 감정 속에 현전시키는 것. 이 모든 것은 매우 흥미로운 활동이다. ―헤세 올해 열여덟 번째 책은 폴커 미켈스가 편집한 헤르만 헤세의 『화가 헤세』(박민수 옮김, 이레, 2005)이다. 헤세는 문학자로서만이 아니라 화가로서도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배운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정약용) 배운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배운다는 것은 곧 깨닫는 것을 말한다. 그럼 깨닫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깨달음이란 무엇이 잘못인지를 깨우치는 것이다. 잘못을 깨우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바른 말로 깨우칠 수 있을 뿐이다. (중략) 이미 저지른 잘못을 깨닫고 부끄러워 뉘우치고, 다시 그 잘못을 고쳤을 때 비로소 배운다고 할 수 있다. ― 다산 정약용, 『아언각비』 서문 중에서 올해 열일곱 번째 책은 한정주 외의 『조선 지식인의 말하기 노트』(포럼, 2007)다. 일찍이 공자가 사물(四勿)의 하나로 다룰 만큼, 무엇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는 선비들이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의 하나였다. 이 책은 조선 시대 선비들이 쓴 문집에서 ‘말하기’와 관련한 여러 문장들을 모은 책이다. 곁에 두고 조금씩 읽..
나만의 인생을 만들고 싶을 때(사이토 다카시)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나만의 인생을 만들고 싶을 때 가장 쉬운 방법은 앞서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의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이다. 특히 ‘고전’이라고 인정받는 책들은 큰 도움이 된다. 고전은 오랜 시간과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도 살아남은 책, 인류에게 원대한 비전을 주었거나 새로운 시대를 열게 해 준 책이다. 역사의 부침 속에서도 살아남은 만큼 거기에는 지금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삶의 소중한 가치들이 담겨 있다. ― 사이토 다카시 올해 열여섯 번째 책으로 고른 것은 사이토 다카시의 『내가 공부하는 이유』(오근영 옮김, 걷는나무, 2014)이다. 예전에 같은 저자가 쓴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홍성민 옮김, 뜨인돌, 2009)를 재미있게 읽은 터라 가벼운 마음으로 골랐다. 일본의 신서가 흔히 ..
‘조선 최고 지식인’ 추대는 정쟁(政爭)의 산물 두 주에 한 번씩 《문화일보》에서 신간을 읽고 서평을 쓰고 있다. 빠르게 책을 읽고 이를 서평이라는 형태로 남기는 것은 여러 번 밝혔지만, 내게는 또 다른 즐거운 모험이다. 편집자 일을 하면서 습관적으로 책을 읽어 왔고, 또 기꺼이 개인적으로 이런저런 책을 골라서 읽어 왔기에 읽기 자체는 그다지 모험이 아니다. 거기에 쓰기가 덧붙은 것은 아직 익숙지만은 않지만, 또 평생 늘 해 왔던 일이기도 하다. 지난 주에 읽은 책은 연세대 최연식 교수의 『조선의 지식계보학』(옥당, 2015)이다. 니체가 생성하고 푸코가 생각의 도구로 발전시킨 학문인 ‘계보학’을 이용해서 정암 조광조, 퇴계 이황, 율곡 이이, 하서 김인후 등이 조선 최고의 지식인으로 손꼽히기까지의 과정을 추적한다. 말로 물어뜯고 위협하고 피로 얼룩져..
교육에 대하여(김정희) 모든 사람들이 아이였을 때에는 총명한데, 이름을 기록할 줄 알만 하면 아비와 스승이 ‘경전의 주석’과 ‘과거 시험에 응시할 자들의 위해 모아놓은 어려운 어구 풀이’들만을 읽힘으로써 그 아이를 미혹시키는 바람에, 종횡무진하고 끝없이 광대한 고인들의 글을 읽지 못하고 혼탁한 흙먼지를 퍼먹음으로써 다시는 그 머리가 맑아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인재설(人才說)」(추사 김정희) 읽는 것을 정리하는 것이 따라 가지 못한다. 시간을 쪼개서 간신히 읽을 뿐, 블로그에 정리할 짬을 내기가 정말 어렵다. 올해 열다섯 번째 책으로 고른 것은 『길 위의 인문학』(경향미디어, 2011)이다. 구효서, 한명기, 신창호 등이 독자들과 함께 인문학의 현장을 답사하는 ‘길 위의 인문학’ 프로그램에서 한 강연 기록을 모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