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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책 읽기

편집자, 지적혁명 만들어내는 지성의 프로모터(문화일보 서평)

“편집자, 지적혁명 만들어내는 지성의 프로모터”


                                


편집자는 지식 또는 사상의 구조에서 잊힌 좌표로 표시된다. 그것은 근대 출판에서 지적 재산권의 소유자, 즉 사상의 주인을 표시하기 위한 구조적 필연성의 결과이자 주체의 결단, 즉 스스로 대중의 눈밖에 있기를 바랐던 편집자들의 자기규정 탓이다. 근대란 계약을 통해서 움직이는 사회이고, 서명된 이름을 통해서만 온전히 자신을 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책공장 베네치아』와 『사상으로서의 편집자』는 저자의 그림자 뒤에 숨어 있던 존재인 ‘편집자’를 전면으로 호출한다. 물론 두 책의 층위는 다르다. 『책공장 베네치아』는 사학자의 저술답게 자료를 조직해서 베네치아라는 공간에서 일어난 서적과 출판의 역사를 엄밀히 재구성하는 데 치중한 반면, 『사상으로서의 편집자』는 편집자라는 존재가 사상의 탄생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를 심층부까지 꿰뚫어 들어간다.

『책공장 베네치아』는 구텐베르크 혁명 이후, 왕성한 출판 활동을 통해 현대적 지식이 탄생하는 데 거대한 영향을 미쳤던 ‘책의 거리, 출판의 도시’ 베네치아로 독자들을 데려간다. 거기에 페트라르카와 단테를 세상에 알린 편집자 알도 마누치오가 있다. 『사상으로서의 편집자』는 20세기 초 독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시골 교회 목사에 불과했던 신학자 칼 바르트를 세상으로 불러올리고, 실패한 신학생이자 서점원이었던 헤르만 헤세를 발굴하고, 사상적으로 방황하던 막스 베버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던 편집자 디더리히스가 빛을 발하고 있다. 이들은 편집자들 사이에서나, 그나마 소수만이 기억하는 이름들이다. 그러나 이들 두 사람을 비롯해 편집자들이 지식이나 사상의 세계에 남긴 흔적마저 희미한 것은 아니다. 먼저 알도 마누치오의 경우를 살펴보자.

“베네치아는 책의 발생지이기도 하지만 출판 산업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이 도시에서 처음으로 인쇄에 투자하는 사람을 ‘출판업자’라고 부르기 시작했으며 문구상, 상인, 인쇄공, 문인, 저자, 편집자 등도 생겨났다.”

이 활기찬 도시에서 출판을 오늘날 우리가 머릿속에서 떠올리는 출판으로 만들어낸 사람이 바로 알도 마누치오다. ‘문고본’을 만들어낸 사람, ‘필기체’(이탤릭체) 인쇄를 시작한 사람, 단테, 페트라르카 등 최초의 베스트셀러 제조기, 세미콜론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 어퍼스트로피와 악센트 부호를 도입한 사람 등 그의 업적은 휘황찬란하다. “회화에 라파엘로가, 조각에 미켈란젤로가, 건축에 브루넬리스키가 있다면 출판에는 알도 마누치오가 있다”는 말을 들을 만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는 “책을 읽는 즐거움”을 발명했다. 독서가 공부를 위한 것이거나 종교 생활의 도구가 아니라 여가 생활을 즐기기 위한 “취미”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지적인 혁명”을 만들어냈다. ‘지식의 세속화’, 달리 말하면 ‘지식의 민주화’가 그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편집자들 사이에서 전설로 추앙받는 마누치오는 현대적 출판 자체를 발명했다. 그전까지 출판은 인쇄업자들의 돈벌이 수단으로 책을 단순한 상품으로 취급했다. 내용이 오자투성이여도 아무 상관없었다. 그러나 마누치오의 책은 달랐다. 그는 자신이 출판하고 싶었던 책에 대한 당대 최고의 지식인을 발굴해서 꼼꼼하게 정본을 확정하고 엄밀한 교정을 거쳐서 책을 출판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마누치오는 “판매 가능성뿐만 아니라 원고의 내용에 근거하여 출판할 대상을 선택”했다. 책을 지식이 저장되고 파생되는 고급 전진기지로 만든 것이다. 에라스무스 같은 당대의 지식인이 마누치오와 책을 내고 싶어서 먼 거리 여행을 꺼리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어떤 사상과 만나고 무언가를 읽기 이전에, 이미 출판인이 만들고 연출해낸 극장의 무대 앞에 앉혀져 있다.”

후카이 토모야키의 이 말은 최초의 편집자였던 마누치오에게 바쳐져도 아무 손색이 없을 것이다. 『사상으로서의 편집자』는 이러한 입장에서 마누치오의 독일인 후예들, 즉 디더리히스, 로볼트 등 오늘날까지도 이름이 낯설지 않은 출판의 역사를 ‘사상’의 존재와 관련해서 깊게 탐색한다. 저자에 따르면, 근대의 들어서 교회, 학교, 아카데미의 권위가 약화되면서 ‘사상’이 제도권 바깥의 대중들에게까지 활동 영역을 넓혀 갔으며, 이 자유롭고 광활한 영역에서 대중이 필요로 하는 사상을 적시에 공급하는 지성의 프로모터인 편집자가 등장했다.

편집자는 비록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지라도 책의 내용과 표현에 깊숙이 관여하면서 새로운 사상을 창안하고 출현시키는 무대의 연출자로서 일한다. 하나의 사상이 저자의 머릿속에 언제, 어떻게 존재했느냐와 상관없이, 그 사상이 대중에게 전달되고 지식 사회에 격렬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에는 반드시 편집자의 손이 닿아 있다. 후카이 교수는 칼 바르트와 디더리히스의 관계에서 그 전형성을 본다. 현대 신학에 혁명적 반응을 일으킨 칼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는 스위스에서 출판되어 300부 정도 팔린 채 창고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상의 잠재력을 알아본 디더리히스는 재고를 모조리 사들이고 바르트를 독일에 초청해 지성계에 소개함으로써 그를 일약 사상계의 스타로 키워 낸다. 디더리히스의 안목, 즉 ‘편집자의 사상’이 지식의 풍경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은 것이다. 『사상으로서의 편집자』는 편집자라는 존재를 사상사의 전면에 끌어내면서 ‘저자-독자’에만 주목하는 기존 사상사 연구에 ‘저자-편집자-독자’라는 관계 구조를 들이대는 획기적 전환점을 제시한다. 

오늘날 한국에서 편집자의 위치는 ‘시장의 침공’을 받아 상당히 위태롭다. 위태로움 속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갔던 선배들의 온갖 모습들을 우리는 이 두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인문학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반드시 읽어 볼 것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