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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어들고 읽어라(Tolle, Lege) _ 읽기의 힘에 대하여 “어디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고백』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묻는다. 인생 전체가 비틀린 것 같은 지독한 불안에 사로잡혀 안절부절못하면서 그는 정원을 이리저리 서성인다. 마음이 좀처럼 답을 얻지 못하고 미몽(迷夢)이 길어질 때, 문득 옆집에서 아이가 말하는 소리가 들려온다.“톨레 레게(Tolle, Lege)!”집어들고 읽어라. 하느님은 천사를 통해 계시하지 못할 때, 흔히 아이의 입을 빌리곤 한다. 읽어라. 희망 없는 좌절이 길어질 때, 해답 없는 절망이 연이어질 때, 하느님은 말한다. 집어들고, 읽어라.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서를 다시 읽었다. 성서를 읽은 후 신의 목소리를 듣고, 교회를 다시 써서 세계의 기울어진 축을 바로 세웠다.읽기는 인간이 혼자 살아가지 않도록 막아 주는, 신 없이 신의 언어..
[21세기 고전] 어둠을 쌓아 노래를 만들다 _황정은의 『백의 그림자』(민음사, 2010) ※ 《경향신문》에 연재 중인 ‘21세기 고전’. 이번엔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를 다루었습니다. 이 작품이 나왔을 때, 우리는 용산이라는 인세지옥을 함께 목격하고 망연해 있었습니다. 사람이 불꽃 속에서 스러지는 참사를 보았지만, 입술이 얼어붙어 이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견디면서 언어를 보태 연대를 깊게 이루는 의무를 어떻게 다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이때 황정은이 『백의 그림자』를 들고 일어섰습니다. 막힌 목을 뚫고, 굳은 혀를 풀고, 닫힌 입술을 열어 주었습니다. 이 책을 만들면서 그 마음을 지켜보았기에, 여기에 기록해 두고 싶었습니다. 어둠을 쌓아 노래를 만들다황정은의 『백의 그림자』(민음사, 2010) 『백의 그림자』와 함께 한국문학은 ‘새로운 세상’과..
한국인은 어떻게 읽는가 _ 2016 독서콘퍼런스, 김은하 책과교육연구소 대표 발표 요약 한국인은 어떻게 읽는가2016 독서콘퍼런스, 김은하 책과교육연구소 대표 발표 요약 강릉에서 열린 ‘2016 독서 콘퍼런스’에서 발표된 김은하 책과교육연구소 대표의 발표와 토론 발제를 요약하고, 현장에서 들었던 제 느낌을 살짝 덧붙여둡니다. 김은하 대표의 발표는 「해외 주요국의 독서실태 및 독서문화진흥정책 사례 연구」(2015)와 「학교 교육과정과 연계한 실천 중심 독서교육 활성화 방안」(2016)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이 두 논문은 정책적 시사점이 상당히 다를 수 있는 연구인데, “어떻게 ‘비독자’를 ‘독자’로, ‘간헐적 독자’를 ‘습관적 독자’로 만들 것인가?”라는 문제로 집약되어 연결되면서, 한국의 독서정책 또는 독서운동에서 중요한 방향성이 보이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먼저, 용어 정리부터..
책 읽는 독자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_ 2016 독서콘퍼런스 100분 토론 요약 책 읽는 독자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2016 독서콘퍼런스 100분 토론 요약 강릉시에서 열린 2016 독서콘퍼런스 100분 토론의 사회를 보러 갔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독서 운동가, 연구자, 도서관 사서 등이 책을 사랑하는 시민들과 어울려 이틀 동안 여러 주제를 두고 세션 별로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눈 후, 이를 마지막으로 정리하는 자리였다. 독서동아리 회원들도 다수 참여하여 끝까지 경청해 주었다. 『2016 독서 컨퍼런스 자료집』에 실린 「책을 사랑했던 민족, 그러나 책을 읽지 않는 대한민국 국민」에서 성균관대 철학과 이종관 선생은 ‘인생의 책’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책을 읽음으로써 우리가 얻는 선물은 책과 함께 책이 열어 주는 의미 세계에서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그들이 ..
출판기획자가 답해야 할 일곱 가지 질문들 어제 출판아카데미 강의를 마치고, 가벼운 수다도 마치고, 사무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창 밖으로 인적이 끊어진 거리를 망연히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노트에 적어 두었던 질문들이 떠올랐다.아마 강의 후의 어떤 열기, 어떤 허망 때문이었을 것이다.아직 답을 찾지 못하고, 마음을 짓누르면서 한쪽에 계속 남아 있던 질문들,자료를 아무리 찾아도 답할 수 없는, 그러니 자기한테 물어보면서 희미하게 답을 찾아갈 수밖에 없는 탐색의 질문들.답하지 못한 상태로 아래에 일단 옮겨 적어 둔다. 출판기획자가 답해야 할 일곱 가지 질문들 (1) 먼저 출판을 다시 상상하자. 출판이라는 업(業)의 본질은 무엇인가? (2) 책은 솔루션 가치사슬의 일부다. 책이 다른 솔루션 서비스보다 훌륭한 점은 무엇인가? (3) 세상은 문제로 가득 ..
[문화일보 서평] 동아시아 천년의 베스트셀러 『삼국지』을 좇아서 _이은봉의 『중국이 만들고 일본을 사로잡고 조선을 뒤흔든 책 이야기』(천년의상상, 2016) 동아시아 천년의 베스트셀러 『삼국지』을 좇아서이은봉, 『중국이 만들고 일본을 사로잡고 조선을 뒤흔든 책 이야기』(천년의상상, 2016) ‘중국을 만들고 일본을 사로잡고 조선을 뒤흔든 책 이야기’(이하 『책 이야기』)라는 제목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정곡에 정곡을 더한 ‘퍼펙트 골드’라고 할 만하다. 실제로 제목에 적힌 이 어마어마한 ‘책’은 동아시아 삼국의 역사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다소 거칠게 말하는 게 허용된다면, 적어도 15세기 이후의 동아시아 역사는 얼마만큼은 이 책과 함께 부침을 같이했다고 할 수도 있다. 『책 이야기』에서 다루는 대상은 이른바 『삼국지』다. ‘이른바’라는 표현을 굳이 쓴 것은 『책 이야기』에 나오는 『삼국지』가, 우리가 흔히 『삼국지』라는 말과 함께 머릿속에 떠올리는 『삼국지..
죽음 앞에 선 청년 의사,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다 _폴 칼라니티의 『숨결이 바람 될 때』를 읽고 중국도서전에 갔을 때 가져가서 읽었던 책입니다. 아주 감동 깊게 읽었습니다. 이번 주에 조금 바빠서 시간을 내지 못하다가, 오후에 잠깐 짬을 내서 느낌을 옮겨 보았습니다. 암 선고를 받고 죽음과 대면하고도, 조금도 좌절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으려 했던 한 청년 의사의 마지막 나날이 아름다운 문체로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죽음 앞에 선 청년 의사,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다폴 칼라니티, 『숨결이 바람 될 때』(이종인 옮김, 흐름출판, 2016)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슬픔과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기쁨을 함께 주는 책을 만나는 것은 행운이다. 게다가 그 책이 아름다운 문장과 단단한 인식이 어우러져 읽는 즐거움마저 더한다면 바랄 나위 없다. 일상의 덧없음이 세월을 좀..
‘속도의 편집’이란 무엇인가?(기획회의 기고) 《기획회의》 422호에 기고한 「‘속도의 편집’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입니다. ‘속도의 편집’은 단순히 “책 빨리 내!”라는 말은 아닙니다. 물론 이 부분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세상 변하는 속도 때문에도 그렇습니다. 기획했던 이슈들은 빠르게 낡아서 독자들 관심 밖으로 사라져 버리고, 어느새 새로운 이슈가 등장합니다. 여기에 대응하려면 기획과 출간 사이의 간극을 최소화하는 빠른 속도가 얼마만큼 필요합니다. 하지만 편집과 속도가 만나야 하는 이유는 그 때문만은 아닙니다. 언론이나 방송과 같은 다른 미디어들이 권력이나 자본의 힘에 억눌려 언중에게 전해야 할 바를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할 때, 느린 미디어이자 소수 미디어였던 출판이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1980년대에는 무크라는 형태의 잡지를 통해, 사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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