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평론과 서평/소설 / 희곡 읽기

[21세기 고전] 어둠을 쌓아 노래를 만들다 _황정은의 『백의 그림자』(민음사, 2010)

※ 《경향신문》에 연재 중인 ‘21세기 고전’. 이번엔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를 다루었습니다. 이 작품이 나왔을 때, 우리는 용산이라는 인세지옥을 함께 목격하고 망연해 있었습니다. 사람이 불꽃 속에서 스러지는 참사를 보았지만, 입술이 얼어붙어 이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견디면서 언어를 보태 연대를 깊게 이루는 의무를 어떻게 다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이때 황정은이 『백의 그림자』를 들고 일어섰습니다. 막힌 목을 뚫고, 굳은 혀를 풀고, 닫힌 입술을 열어 주었습니다. 이 책을 만들면서 그 마음을 지켜보았기에, 여기에 기록해 두고 싶었습니다.





어둠을 쌓아 노래를 만들다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민음사, 2010)


『백의 그림자』와 함께 한국문학은 ‘새로운 세상’과도 싸우는 법을 발견했다. 국가 부도 사태 이후, 문학은 사람살이를 송두리째 갈아엎고 재개발하려는 이른바 ‘신자유주의’라는 낯선 괴물과 부단히 맞서 왔다. 밀치거나 밀리면서, 자의로 또는 타의로, 정 붙인 삶의 터전을 박탈당하고 낯선 삶을 강요받은 사람들과 함께 적합한 언어를 세우려 무진장 애를 끓였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너는 해야 한다’라는 억압의 형식을 취하지 않기에(물론 필요하다면 용산에서처럼 공적 권력은 물론 사적 폭력까지 사들여 무자비하고 서슴없이 동원한다), 일반적으로 ‘나는 할 수 있다’라는 자발성 또는 ‘나는 어쩔 수 없다’라는 체념을 통해 작동하기에 현실의 정직한 재현 같은 오래된 수법으로는 실체를 포획하기 어려웠다. 새로운 사태에 맞는 새로운 언어가 있어야 했다. 상징의 홍수를 일으켜 서사의 견고한 둑을 무너뜨리고, 알레고리의 먹물을 떨어뜨려 의미의 투명한 물을 더럽히는 등 온갖 문학적 시도가 한국어의 바다 위에서 ‘도마뱀 떼같이 재재발렀다.’

그리고 『백의 그림자』가, 갑자기, 기적처럼, 등장한다. 이 작품이 이룩한 언어의 도약과 함께 2000년대 문학에서 상실과 모색의 시대가 끝나고 발육과 성숙의 시대가 시작된다. 문체는 얼마나 신기하고 감정은 얼마나 따뜻하며 의미는 얼마나 풍부한가. 세상의 무자비한 폭력을 견디다 못해 불현듯 그림자가 일어서고, 그 그림자를 따라가고 나면 존재하지 못한 듯, 본래 없었던 것처럼 허망하게 철거되는 약한 존재들. 그들이 입술을 얻고 목젖을 빌려 실감 찬 소리를 얻는다. 발화될 수 없었던 신호들이 언어의 섬세한 배치에 힘입어 목소리를 내보낸다.


나는 쇄골이 반듯한 사람이 좋습니다.

그렇군요.

좋아합니다.

쇄골을요?

은교 씨를요.

......나는 쇄골이 하나도 반듯하지 않은데요.

반듯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좋은 거지요.

그렇게 되나요.


휴지와 침묵을 풍요롭게 활용할 줄 아는, 이 어눌하고 공백 많은 대화는 분명히 2000년대 한국소설이 빚어 낸 가장 아름다운 대사 중 하나다. 더듬대면서 조심스레 혀를 움직여 속삭이듯 말 건네는 약자의 화법.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서로의 감정이 옮겨 붙을 때까지 기다린 후에 느리게 한마디씩 주고받는 대화법. 그러나 그 행간으로 넘나드는 사랑의 느낌은 가을 논처럼 풍요롭다. 가만히 읽고 머릿속으로 그려보노라면, 누군가가 심장을 가볍게 쥐었다 놓았다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소설은 서울 종로에 있는 세운상가를 연상하게 하는, 아주 낡고 오래된 다섯 동짜리 건물의 철거를 계기로 하는 이야기다.(그래서 우리는 이 소설과 함께 억울한 생목숨이 사라져 간 용산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밖에 없다.) 대낮에도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을씨년스러운, ‘사람이라면’ 도저히 살 수 없을 곳을 제 삶의 터전으로 삼아 생활하는 이들의 인생 이야기다. 방금 ‘사람이라면’이라고 썼지만, 이들은 사람이 하지 못할 듯한 일을 ‘생계’로 하고, 사람이 살 수 없을 것 같은 곳을 ‘생활계’로 삼으므로, 흔히 사람만 못한, 아니 사람이 아닌 존재로 취급된다. 인두겁을 쓴 유령이기에, 궁지에 몰리다 못할 때 이 사람들의 그림자가 일어서서 사람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소설 속 설정조차 무척 자연스레 느껴질 정도다.


이 부근이 슬럼이래요.

누가요? 

신문이며, 사람들이. (중략)

나는 슬럼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은 있어도, 여기가 슬럼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요.(중략)

언제고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그런 걸까요.


잠시 한눈을 팔면, 어느새, 태어나 자라고 날마다 지났던 익숙한 자리가 ‘슬럼’이 되고, 정신 차리기 전에 소문 없이 진행된 공사로 흔적 없이 사라진 후, 그 자리를 파리나 런던이나 뉴욕을 빼다 박은 낯설고 익숙한 건물이 메운다. 그 자리에 살았던 사람들, 그곳에서 생계를 꾸리고 몸을 움직이고 또한 안식했던 이들은 아무런 자취가 없다. 모두 어디로 갔을까? 

『백의 그림자』는 약자들에게 닿도록 더듬이를 내밀어 만든, 침묵이 가득히 공명하는 고유한 화법을 통해 세계의 무참한 폭력 속에서 소리 없이 사라지는 이들의 내력을 복원한다. “어둠의 입”이 되어 그들의 침묵을 고스란히 기록함으로써 ‘언어의 연대’라는 문학의 소명을 이룬다. 철거라는 끔찍한 절망으로부터 상가 사람들이 서로 바라보고 끌어안고 보듬어, 절망을 딛고 마침내 노래로까지 나아가는 역정을 이토록 짧은 소설에 압축할 줄 알았던 무서운 재능이 없었다면,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했을 것이다.


은교 씨.

하고 무재 씨가 말했다.

노래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