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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공감과 성찰

펭귄랜덤하우스의 탄생이 뜻하는 것(한겨레 칼럼)



지난 10월28일, 책과 지식의 역사에 거대한 지각변동을 일으킬 사건이 일어났다. 6개월간의 비밀 협상 끝에 영국의 ‘펭귄’과 미국의 ‘랜덤하우스’가 합병해 세계 최대의 출판사 ‘펭귄랜덤하우스’로 재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디지털 혁명 이후 음반 산업에서 벌어진 일을 생각해 볼 때, 이것은 어쩌면 전세계 출판을 홀로 좌지우지할 슈퍼 메가 출판사의 출현을 향한 흐름의 출발점일지도 모른다. 당장 두 회사와 함께 이른바 ‘빅6’을 이루어온 하퍼콜린스, 사이먼앤드슈스터, 리틀브라운, 맥밀런 등의 움직임들이 심상치 않다. 생존을 위해 그들 역시 합병으로써 회사 규모를 키우려는 협상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다.

합병의 결과, 펭귄랜덤하우스는 당장 영미 서적 시장의 4분의 1을 단숨에 장악하고, 브라질·인도 등의 신흥 시장과 전자책 분야에서도 시장 지배적 사업자가 되었다. 합병의 파장은 앞으로도 계속되겠지만 그 논리는 단순하다. 합병에 따라 양사는 중복 투자 분야를 없애는 등 대규모 인력 감축과 구조 조정을 통해 3조원 정도의 투자 자금을 확보하고, 이 돈으로 전자책 분야에서 새로운 모험적 사업 모델을 시험하겠다는 것이다. 그로써 두 회사는 아마존이나 애플 등 정보기술 업체가 주도해 온 전자책 혁명에 본격적으로 대응해 시장 주도권을 확보하겠다는 속셈이다. 출판 산업의 근본이 종이책에서 전자책으로 옮겨가는 충격적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세계 출판계를 이끌어 온 이들 대형 출판사의 합병은 서적 유통 분야에서 사실상의 독점 사업자인 아마존의 독주에 대응하려는 것이다. 그동안 아마존은 가격 파괴를 무기로 삼아 서적의 소매 유통 분야를 장악하면서 출판사에 지속적으로 서적 공급가 하락을 압박해 왔다. 또한 2007년 킨들 출시 이후에는 전자책 중심으로 사업 모델을 전환하면서, 작가와 계약을 맺어 직접 책을 출판하고 자가 출판을 조장하는 등 서적의 가치 사슬에서 출판사를 배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임으로써 출판계와 커다란 갈등을 빚었다.

펭귄랜덤하우스의 출현은 서적 시장을 제 입맛대로 지배하려는 전자회사의 공세에 대한 전통 출판사의 반격이 시작되었음을 뜻한다. 합병을 통해 생겨난 메가 출판사는 새로 확보한 자금과 시장 점유율에 기반을 두고 아마존, 애플, 반스 앤드 노블 등 대형 유통 업체과 협상을 벌여 그간 지나치게 낮추어진 책 공급가를 정상화하는 한편, 독자적인 전자책 플랫폼을 구축해 판매에 나섬으로써 아마존 등 전자회사의 탐욕을 견제해 나갈 것이다. 

그런데 고래들의 싸움, 곧 메가 출판사와 메가 서점의 경쟁은 책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작가나 독자에게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재앙이 될 수 있다. 이엠아이(EMI)나 유니버설 같은 합병을 통해 탄생한 초대형 음반사가 보여 주었듯이, 이른바 ‘메가’들은 가능성 있는 신진이나 중견보다는 시장성이 확실히 검증된 브랜드 작가를 선호한다. 또한 그들이 주도하는 시장에서는 멀티플렉스 시대 영화 관객처럼 독자 역시 블록버스터 위주로 독서가 길들기 쉽다.

지금까지 펭귄과 랜덤하우스가 끌어안은, 성공보다 실패 가능성이 훨씬 높았던 원고는 이제 출판사 밖으로 내몰리기 쉽다. 그 원고들은 출판사가 오랜 경험을 통해 노하우를 보유해 온 편집이나 마케팅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메가’들이 짜 놓은 온라인 플랫폼에서 눈 밝은 독자가 발견해 주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자가 출판의 차가운 길바닥에 나앉을 것이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잘 보여 주었듯이, ‘메가’들은 작품의 내재적 가치 때문에 작가나 작품을 선정하기보다는 이미 시장성이 검증된 작가나 작품을 선정해서 재포장한 후 전 세계 시장에서 일시에 팔아 치우는 전략을 선택할 것이다. 

유통되는 음악의 숫자는 극히 늘어났지만 단지 유통 회사의 배만 불려 줄 뿐 대다수의 음악가들은 기아선상을 왔다 갔다 하는 디지털 ‘음원’ 시장처럼, (전자)책 시장 역시 이른바 ‘출판’되는 책의 종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나 그 창작자에게는 책을 냈다는 사실 외에 거의 아무런 대가도 지불되지 않는 곳으로 변해 갈 수 있다. 이미 온라인 서점이 유통을 지배한 이후 베스트셀러만 팔리는 현상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듯이, 이러한 환경에서 독자들은 오히려 공급 과잉으로 인해, 차별화 없이 무한히 노출되는 수많은 읽을거리들 때문에 오히려 선택을 제한받고 특정 도서에 몰려드는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이전에 이 블로그에 포스팅한 「요즘 독자들, 책은 친구 추천으로 산다」를 참고하라.) 이는 거대 자본이 콘텐츠를 지배할 때 흔히 일어나는 일이고, 현재까지는 책의 전자화가 실제로 뜻하는 바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소수 베스트셀러를 창조하는 데에만 역량을 집중할 ‘메가’들의 세상이 오기 전에 시급히 출판의 다양성을 보존할 법적 장치와 거래 관행을 만드는 것이다. 사실 그 첫걸음은 아주 쉽다. 그것은 ‘완전 도서 정가제’의 실현이다. 책이 가격 파괴와 투입 자본이 아니라 콘텐츠의 질로써 독자들의 선택을 받을 수 있도록 견제하지 않는 한 ‘메가’들의 습격으로 인한 책 생태계의 파괴를 막을 방법은 없다.


※ 이 글은 《한겨레》에 실을 때 길이 때문에 청탁 분량 때문에 다소 줄여 보냈던 칼럼의 원본입니다.  《한겨레》 인터넷 판에는 아마존 맞설 ‘괴물’ 탄생…출판 다양성엔 ‘독’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습니다.


★ 두 회사의 합병에 대하여 미국의 그래픽 디자이너 토드 골드스타인(Todd Goldstein)이 그린 놀이 일러스트레이션들. 위쪽에 삽입한 펭귄 하우스 로고도 그의 작품이다. 개인적으로는 맨 아래쪽 랭귄 하우스가 가장 재밌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