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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공감과 성찰

거대한 여백 - 디자인에 대한 몽상(《디자인》 2012년 7월호)


이 글은 작년 7월에 월간 《디자인》에 실었던 글이다. 게재 직후에 원고 파일을 실수로 삭제하는 바람에 사라졌는데, 북디자인과 관련해서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문득 발견했다. 과거에 쓴 글이 어느 날 갑자기 쏟아져 들어오는 기분이다. 여기에 옮겨 둔다.


월간 《디자인》 2012년 7월호



거대한 여백


디자인에 대해서 쓰려 하니 가장 먼저 거대한 여백이 떠오른다. 

순전한 흰색, 어떤 문자도 문양도 그 위에 그려질 수 없는 절대 공간. 한창 산을 좋아했을 때, 새벽에 텐트 문을 열고 나오면 첫 빛으로 자태를 드러내면서 망막을 하얗게 태우고 언어의 길을 단숨에 끊어버렸던 눈 내린 직후의 흰색 산야. 어느 한밤중 문득 자다 일어나 꿈속에서 썼던 아름다운 시를 끼적여보려고 대학 노트를 여는 순간, 형광등 아래에서 날카롭게 빛을 뿜어내 머릿속의 리셋 단추를 눌러버리곤 했던 흰색 종이.

어쩌면 창조란 누구나 한 번쯤 마주쳤을 이 순백의 절대 공간을 잊지 못하고, 아니 잊지 못해서 자기 안에서 끊어진 언어의 길을 다시 이어보려는 어떤 행위일지도 모른다. 무(無)로 돌아가려는 흰색 공간에 저항해서 언어든, 색깔이든, 소리든, 영상이든 자신만의 아트 오브젝트를 힘을 다해 세상에 배치하여 의미를 낳아보려는 내적인 동역학에 온전히 헌신해버리기. 서머싯 몸이 쓴 『달과 6펜스』의 스트릭랜드처럼, 결국에는 패배해 무로 돌아갈 줄 알면서도 피 끓는 충동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평범을 버린 전사들을, 수많은 좌절과 절망의 시간을 조금씩 반복해 쌓으면서 깊고 굳게 단련한 감각을 갖춘 초인들을 좋아한다. 흰색의 공포를 이겨내고 마침내 세상에서 자신만의 언어를 갖게 된 시인들, 작가들, 예술가들을 사랑한다.

편집자로서 모든 원고를 사랑하지만, 가장 기쁠 때는 역시 신인의 첫 원고를 읽는 시간이다. ‘저마다의 고유한 죽음’이 있듯이, 저자마다 언어의 틈 속에 자기만의 흰색을 깊이 감추고 있다. 눈 속에서 간신히 고개를 들어 올린 동백꽃, 강렬하게 자신을 어필하는 첫 붉음을 맞이하는 즐거움과 그 배경에 크고 깊게 웅크려서 저자의(어쩌면 독자까지도) 영혼을 유혹하는 순전한 흰색을 남들보다 한 걸음 빨리 읽어냈을 때의 어마어마한 전율. 지독한 매운맛에 서서히 빠져들 듯이 뇌를 직접 건드리는 듯한 이 충격은 한없이 중독적인 까닭에 한 해에 수십 번씩 맛보는데도 전혀 물리지 않고 늘 새로운 책을 안달하게 한다.

나는 책의 디자인 시안이 올라올 때마다 저자와 디자이너, 두 영혼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려 애쓴다. 오늘날의 모든 산업에서 디자인이란, 단지 외장을 구축하는 것 이상의 고도의 제품 전략으로, 심지어 소비자의 니즈를 창조할 수 있는 물성을 만들어내는 고차원적인 기업 행위로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독자는 북 디자인에 항상 그 이상의 가치가 깃들기를 기대한다. 한 권의 책에서 저자의 영혼뿐만 아니라 또 다른 창조자인 디자이너의 영혼도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책은 디자이너의 흰색과 저자의 흰색이 만나서 한층 굳세진 무(無)를 향한 중력과 그 공포를 넘어서기 위해 두 창조적 영혼이 만나 서로 충동을 자극하고 표현을 벼리면서 세계를 향해 뛰쳐 나가려는 에너지가 교차하는 공간이다. 편집자는 두 창조자를 격려하고 표현력을 증폭하는 창조 기계로서, 즉 턴테이블과 스피커 사이를 연결하는 앰프가 되어 책을 하나의 작품으로 전유하는 과정에 참여한다.

북 디자인은 저자와 디자이너와 편집자로부터 나오는 세 가닥 창조적 힘이 때로 낮게 속삭이고 때로 크게 소리치면서 서로 뒤섞이는 카오스 상태로 출현한다. ‘책’이라는 용광로 속에서 녹아내리면서 서로를 향해 흘러가는 유체 운동, 프랜시스 베이컨 그림 속의 인물처럼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 덕분에 자기만의 윤곽선에서 해방되는 생성 운동이 모두를 사로잡는다. 각자를 버리고도 흰색의 무로 환원되지 않는 낯선 회귀들, 쾌락 경험들의 연쇄. 종자기들을 만난 백아들.

때때로 나는 건물 옥상에 올라가서 한강을 내려다보면서 흰색을 생각한다. 마침내 책으로 이어진 ‘나’들을 한없이 유혹하는 동시에 소멸로 몰아넣는 허무의 공간을, 저자와 디자이너와 편집자를 관통하면서 책을 일으켜 세운 창조의 힘을 생각한다. 책이라는 사건에 등장했던 저자들, 디자이너들, 편집자들, 독자들을 생각한다. 수많은 추억을 생각한다. 

디자인에 대해서 쓰려 하니 가장 먼저 거대한 여백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