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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공감과 성찰

여름에 읽기 좋은 우리 문학


예스24에서 여름마다 내는 전자 잡지 《문학의 숲을 거닐다》의 기획 코너 ‘여름에 읽기 좋은 우리 소설’에 짤막한 글을 하나 썼다. 아래에 옮겨 둔다.



문학과 관련해서 세상에 떠도는 말들 중 듣기 괴로운 말이 있는데, 이른바 문단 4대 천왕과 같은 말이다. 어디에서 연유한 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공지영, 김훈, 신경숙, 황석영 등 소설책을 내기만 하면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작가들을 가리키는 말인 듯한데, 이건 무슨 무협 세계도 아니고, 말초적 호기심을 달구어서 세속적 관심이나마 끌어 보려는 속셈이 어쩐지 아프고 불편하다.

문학이란 제자리에서 각자의 모양으로 피어나는 야생초와 같다. 네 가지 풀 말고도 어떤 풀이든 상관없이, 이 뜨거워지는 지구에서 삶의 온실 가스를 빨아들여 청량한 산소로 바꾸어 가는 천천한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네 풀의 이름과 모습만을 입에 붙이고 나면, 소리 없이 지구를 식히는 많은 풀들의 헌신과 그들이 피우는 꽃들의 아름다움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법이다. 주의하라, 귀한 것은 쉽게 눈에 걸리지 않고 숨은 보석은 곧장 입에 오르지 않는다.

, 이 자리를 빌려 말하건대, 추천이란 기껏해야 작은 영광이고 축복이요, 본질로는 커다란 죄악인 것이다. 그것은 이 순간에도 수없이 피어나고 있는 작품의 만화경 위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는 필사적 노력의 희미한 성취이지만, 동시에 그 구획을 통해 작품의 자유로운 길을 가리는 억압의 뚜렷한 행위이다. 그러나 낯선 길을 걷는 데에는 때때로 지도가 필요한 법이고 길잡이도 좋은 역할을 할 때가 있다는 어떤 이의 말을 믿고 한국 소설을 뒤적이면서 여름을 시작해 보기로 하자.



정유정의 28(은행나무)을 새로운 한국형 스릴러, 그러니까 잘 만들어진 이야기만으로 즐기는 것은 재미없다. 가상의 도시 화양에서 발생해 급속히 번져 가는 전염병과 이로 인해 폐쇄된 도시에서 벌어지는 생존의 잔혹극을 다중 화자를 동원해 물 샐 틈 없이 구조화한 이야기 자체도 물론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문체 자체이다. 스타카토로 날카롭게 찔러 들어오는 호흡 짧은 문장들의 끈질기고 끝없는 연쇄, 그리고 그런 문장들이 중첩되면서 만들어 내는 심리적 긴장은 한국 문학에서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종류이다. 이 소설을 손에 들었다면, 문체가 사건을 부르고 사건이 문체에 호응하는 한국 문학의 새로운 소설 작법을 만나는 기쁨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민음사)에는 어쩌면 미래의 한국 문학 전체가 담겨 있다. “나는 쇄골이 반듯한 사람이 좋습니다/ 그렇군요/ 좋아합니다/ 쇄골을요?/ 은교 씨를요/ ......나는 쇄골이 하나도 반듯하지 않은데요/ 반듯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좋은 거지요마치 동양화 같은, 여백을 영리하게 활용할 줄 아는, 이 어눌하고 공백 많은 대화법은 2000년대 한국 문학이 빚어 낸 가장 아름다운 문장의 하나다. 천천히 읽어 가면서 작가의 문장 호흡에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황홀할 터인데, 도심 한가운데 오래된 전자상가에서 일하는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그곳 사람들의 삶을 풀어내는 이 작품은 현대 한국인의 비루한 삶이 문학으로 승화할 때 불거지는 정치적, 사회적, 윤리적 문제들에 대한 심오한 통찰마저 품고 있다. 문학이 윤리를 잃을 때 모든 것을 잃는다면, 황정은의 작품은 한국 문학이 지금도 살아 있다는 엄중한 증거로 우뚝 서 있다.


    


이영훈의 체인지킹의 후예(문학동네)와 최민석의 쿨한 여자(다산책방)는 새로운 이야기들이 현대적 삶의 충격들을 어떤 식으로 조직해 가는지를 보여 준다. 삶의 깊이를 잃어버리고 대중 소비가 만들어 준 삶의 이미지에 의존해 도시를 부유하는 세대에게는 사랑도, 결혼도, 육아도 모조리 쿨한놀이로 치환되어 버린다. 이 가볍디가벼운 포스트모던한 삶에 윤리적 닻을 내리는 일이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들의 한 임무인데, 이영훈과 최민석이 세대를 대표해 그 일을 떠맡고 나섰다. 그들의 소설에서 흥미로운 것은 한국 소설이 흔히 보이는 울증의 방식을 버리고 한껏 유쾌하고 발랄한 조증의 방식을 택했다는 것이다. 하나의 사건이 가볍게 서로를 건너뛰면서 다른 사건과 접합했다가 쉽게 분절되어 또 다른 사건으로 이어지는, 그러니까 기존 한국 소설들이 흔히 빠져들었던 무의미한 독백으로 가득한 생각의 지방 덩어리들을 깨끗이 태워 버린 초경량 다이어트 소설들. 그러면서도 웃음이 이상하게도 어떤 애수를 불러들이는 기이한 체험. 어쩌면 이것들에서 우리가 기다려 온 새로운 소설의 희미한 그림자를 예감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혹시 여름에는 더욱 이야기를 읽고 싶어지지 않는가. 이유는 전혀 없다. 갈증이 그저 무작정 상상을 부르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알베르 카뮈의 말처럼, 강렬한 태양, 이글거리면서 모든 이성적 사유를 증발시켜 버리는 햇빛, 햇빛 탓일 것이다. 지금, 필자가 내민 지도 한 장이 독자들에게 햇빛의 유혹을 촉발하는 청첩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