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관련 예산 삭감과 정책 변경, 도서관 검열, 출판 관련 기관 통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등의 배치에서 드러나는 것은 출판 산업의 취약성이다.
오늘날 지원체제의 핵심인 정부의 출판지원사업이 사실상 검열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이제 출판 통제는 검찰과 경찰을 동원하는 압수수색, 폭행, 구속과 같은 물리적 검열이나 출판사 등록 취소나 판매금지 조치와 같은 제도적 검열이 아닌 예산 변경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권력에 대한 비판의 언어도 ‘표현의 자유’나 ‘민주주의’, 혹은 ‘헌법’이 아닌 “출판권자의 권리 보장”과 “출판산업의 발전”으로 바뀌어 왔다.
출판인들이 출판을 곧 문화의 뿌리이자 문명의 본질로 명명함으로써 국가가 마땅히 지원하고 육성해야 할 대상으로 구성할 때, 문화는 국가에 의해 지탱되어야 하는 위태로운 대상으로 구성되고, 국가는 문화를 책임지는 주체로 구성된다. 이 때문에 출판인은 정부 정책에 비판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집회를 열기도 하지만, 지원체제의 전제를 그대로 수용한다.
이는 ‘출판인’과 ‘출판계’ 내부의 차이를 드러낸다. 사회 비판적이고, 진실을 기록하고, 약자의 편에서 권력에 맞서는, “시대가 필요로 하는, 혹은 시대를 뒤바꿀 언어를 유통하는 노동자들”로서의 ‘출판인’도 있고, 문화예술인에 대한 통제에 침묵하는 ‘출판인’도 있다.
흥미로운 것은 다른 산업 분야와 달리 출판 산업에서는 상품의 내용과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 사이의 불일치가 단순한 ‘잘못’이나 ‘위법’이기보다 ‘위선’이나 ‘배신 ’ 혹은 ‘모순’으로 의미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낭만과 정의를 말하는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낭만적이지도 정의롭지도 않다는 말과 공명한다.
또한 이것은 출판 지원의 가치체계가 출판 시장 내부의 문제를 봉합하는 기제를 보여준다. ‘좋은 책이지만 많이 팔리지 않은 책’을 만든 편집자들에 대한 실적 압박 등 출판사 내부의 문제에 불만을 품고 있지만 출판은 그래도 “진보적 가치”를 담는 일이라고 [전반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생산물이나 노동 자체에 초점을 두는 ‘출판업’이나 ‘출판 산업’과 달리, 출판인은 블랙리스트나 예산 삭감 등으로 인해 책, 출판사, 작가, 혹은 산업 전체에 불이익이 발생했거나 예상될 때, 혹은 그 노동의 중요성이나 헌신을 강조할 때, 주로 출판에 관련된 민간 단체들에 의해 등장하는 자기 호명이다.
출판 지원의 가치체계에서 공익은 ‘국가경쟁력’과 ‘저항의식’, ‘시대의 기록자’, ‘교양’, ‘약자들의 목소리’와 같은 이질적인 단어들의 배치로 구성되어 있다. 이 이질적 배치에서 주체화된 출판인은 ‘반민주주의적인 보수 정권’에 맞서 ‘진보적 가치’를 외치지만, 권리의 언어로 투자를 유치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유지하거나 상승시킬 수 있게 된, 지원체제 속 피투자자 주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_ 안희제, <좋은 책 만들기와 작가 되기의 곤란>(연세대 석사학위 논문, 2025)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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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답니다.
이 논문은, 경제인류학적 관점에서, 국가 지원을 받아도 되는 주체인 이른바 출판인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이른바 좋은 책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으며, 누가 어떻게 작가가 되는가를 다룬다.
저자에 따르면, 출판의 공공성 혹은 사회적 가치는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역사적으로 구성된 결과물이다. 출판인 역시 마찬가지다. 출판을 한다고 모두 출판인은 아니다. 출판을 하지만, 출판 자본가일 수도 있고, 출판 노동자일 수도 있고, 단지 편집자일 수도 있다.
저자는 출판인이 현재 한국 출판 시장의 가치화 실천에서 생산된 결과물이라고 말한다. 출판인은 발전주의적·국가주의적 국민 주체와 민주화 운동을 중심으로 이에 대항한 민중 주체가 출판의 문화산업화 과정에서 착종된 일종의 키메라와 같다.
제도적 민주화 이후 출판의 문화산업화에 따라 출판에 대한 국가 검열체제는 출판 지원체제로 패러다임이 바뀌었다.(간행물 윤리 위원회가 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되었다!) 그 와중에 도서정가제는 출판의 가치를 경제적 가치와 대립되는 공익이나 공공성을 집약한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이때 출판인이란, 이 대립을 출판 산업에 대한 [정부] 투자 가치의 근거로 동원하는 주체이다. 이럴 때 출판인은 사회비판 의식을 공익적 콘텐츠로 구성하여 투자 가치를 상승시키는 행위자로 나타난다.
그런데 출판 시장의 변화 속에서 책의 가치가 구성되고 실행되는 방식, 그리고 ‘좋은 책’의 개념 또한 독재 시절과는 달라졌다. 책은 그 자체로 완결된 상품이 아니라, 이제 작가가 계속 작가로서 활동할 수 있게 하는 사물이 되었다.
이 때문에 출판 기획은 작가, 편집자, 출판사보다 독자의 수요를 고려하고, 소셜 미디어를 활용하여 사람과 책의 가치를 계산하는 과정으로 바뀌었다. 기획서를 작성하고, 이를 집행하는 실제 출판의 과정은 금전적 비용, 물성, 매력, 발견성, 시의성, 신뢰성이라는 여섯 개의 가치화 등록부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렇게 상품으로 만들어진 책을 결정적으로 좋은 책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은 작가다. 작가는 ‘글을 쓰는 사람’이나 ‘책을 낸 사람’과 같은 (자기 규정적이거나 타인의 호명에 의한) 정체성이기보다, ‘책을 내고 그것과 관련된 원고 청탁, 강연, 북토크 등으로 자신의 생활을 주로 유지하는 상태’, 즉 비즈니스 모델이다.
출판이 쇼 비즈니스에 가까워지고 있는 지금, 작가는 소셜 미디어와 북토크 등을 통해 사람들을 직접 만나며 자신의 가치를 상승시키며 살아가는 피투자자 주체가 되었다. 이제 작가들은 인스타그램으로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고, 독자 및 팔로워들과 소통하고,북토크를 통해 직접 만나서 더욱 가까운 관계를 형성하고, 글쓰기 모임을 열어서 수익을 창출하며 독자를 관리하지 않으면 작가로 불리기 힘들게 되었다.
무척 거칠고 성긴 면이 많은 논문이지만, 편집자들이 필독할 만한 글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출판인이라는 표현을 잘 안 쓴다. 내가 그 안에 속해 있지 않다고 스스로 느껴서인 것 같다. 이 말보다 나는 편집자 또는 읽기 중독자가 더 좋다. 작가로서 정체성도 아주 약한데, 먹고사는 데 필요한 돈을 사는 매문꾼에 더 가까워서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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