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계에서 이중 시장 또는 다중 시장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흔히 이를 OSMU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듯하다. 그래서 OSMU는 당연한 전략으로 생각하고, 이중 시장에는 부정적이다. 그런데 사실 이건 같은 말이다. OSMU를 옆 동네에 가서 영화 만들고 드라마 만들고 다큐 찍는 것만 생각하는 듯하다. 그런 OSMU는 어차피 소수만 가능하다.
아울러 출판 내에서 이중 시장을 말하면, 사람들은 설마 모든 책이 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건 논의가 너무 '현재 내 책' 중심인 듯하다. 한국어 시장은 좁고, 내가 내는 책은 대개 이중 시장에 부적합하므로, 문고본 같은 건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현재 출판 시장이 정체되어 있고, 앞날이 어두우니까 이를 타개해서 이리저리 머리 굴려 보는 일, 사고 실험은 불가능하다.
냉정히 말하면, 한국에서 출판되는 대다수 책이 아마 다중 시장용이긴 어렵다. 특히 문고형 도서로는 나오긴 힘들다. 두 번 팔 수 없을 정도로 잠재 독자가 적고, 현재의 출판 환경에 최적화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인구 운운하는 건 쫌.... 삼중당 문고를 기억하세요. 1970년대에 현재보다 독자 수 훨씬 적었을 때도 불티 나게..... 가격/품질 다 좋은 신국판 반양장 단행본에 밀려 사라졌지만. 문화에는 경로 의존성이 있어서 일단 이렇게 반양장 중심의 시장이 주가 되면 되돌아가기 어렵긴 하다.
그런데 본래부터 문고본의 대상은 거의 문학, 고전, 실용서(그런 성격의 에세이), 콜렉션 정도다. 처음부터 문고로 기획하는 경우도 없다. 그런 건 자살 출판이다. 문고는 대부분 비용을 아끼려 Reprint에서 시작한다. 대중 소설이나 극도로 적은 비용으로 개발 가능한 편집형 실용서만, 그것도 서점 공간을 상당히 장악한 경우에만 가능하다. 예외가 있다면, 고단샤 학술 문고 정도인 듯싶다. 아마도 이건 고단샤에서 만화 팔아서 하는 사회 환원 사업에 거의 가까울 테다. 다른 분야에선 문고본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논픽션 쪽은 가격을 낮추어 시장을 창출할 때 신서 또는 팸플릿 형태를 많이 취한다. 잘게 쪼개 팔기는 인쇄본 시대 초기부터 독자 확보를 위한 유력한 출판 전략이었다.
루터는 독자들 마음과 출판 시장을 꿰뚫어 보는 천재적 저술가였다. 다른 저자들이 두꺼운 한 권을 쓸 때, 그는 사상 전파를 위해 상황에 발 맞추어 치고 빠지는 전략을 구사했다. 루터의 저술 6~7책을 합쳐야 다른 저자 책 한 권 분량과 비슷하다. 글도 잘 썼다. 강론을 자주 하니까, 저절로 내용도 만들어진다. (마치 강연/연설해서 책 내는 일본 저자들처럼.....)
에라스뮈스, 로크, 흄 등도 이런 팸플릿 전략에 능숙했다. 이는 유구한 역사가 있다. 마치 유유출판 책들처럼 원고량 많지 않고, 원가 적게 들도록 가볍고 얇은 팸플릿으로 치고 빠지곤 했다. 요즘 인문/사회 에세이로 내는 책 중에 이런 책이 좀 눈에 띈다. 단일 주제로, 빠르게 이슈에 달라붙기. (과자 가격 안 올리고, 양 줄이고 질소랑 섞어 팔듯, 불황과 저소비에 대응하려고 가격은 안 올려도 페이지/판형/원고량 등은 계속 주는 중이다.)
에디션, 보급판 등에서 보듯 현재도 두 번 팔기는 일상적이다. 이걸 일시적 마케팅 도구로 쓰느냐, 아니면 아예 시장 창출로 가느냐는 출판 내부의 역학과 의지가 결정한다. 내 생각에, 빠르든 늦든 다중 시장으로 가는 건 막기 힘들다. 비독자를 독자로 만드는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지 않으면, 좁은 공간에서 무한 번식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무엇보다 온라인에선 목록 절판이 없다. 그러니까 물리적 증가가 설령 없어도, 출판사 숫자는 자꾸 늘어나고, 도서 경쟁은 갈수록 강화된다. 그런데 한국은 출판사 숫자와 발행 종수가 증가 중이다.(작년엔 좀 줄었지만)
이런 환경에서 새로운 시장이 안 만들어지면, 결국 이론적으로 시장 점유율 무한 분할밖에 남지 않는다. 서서히 평균 판매량, 초판 부수, 반품 또는 미출고 재고 부수가 늘어난다. 이에 맞추려면 가격이 계속 올라간다. 이는 물가 상승률보다 빠를 가망성이 높고, 독자 감소의 주 원인이 된다.
게다가 출판은 여가 시간 미디어다. 넷플릭스 4인 가족 구매 한 달 돈 내면 18,000원이다. 한 사람당 5,000원도 안 된다. 콘텐츠는 거의 무한이다. 유튜브는 무료고, 포털 뉴스 뒤적이는 것도, 페북 와서 노닥거리는 것도 무료다. 블로그에서 괜찮은 글 읽는 것도 무료다. 책은 이런 것들과 시간을 두고 경쟁한다.
가격이 계속 올라가면, 어쨌든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중위 소득 이하로 소득이 거의 고정되는 하층은 책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알바 뛰어 학교 다니는 중산층 이하 아이들도 그렇다. 아울러, 언제 하층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불안한 중산층도 선뜻 지갑 열기 힘들다.(이건 책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여가 상품이 다 비슷하다.) 가처분 소득이 간당간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책은 다시 소수 귀족의 도구로 변한다. 이미 독서 양극화, 구매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면서 그런 흐름으로 가고 있다. 생존을 위해 내가 책을 내는 일하고, 대안을 고민해 보자는 출판 담론은 좀 달라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시장 외부 개입에 따른 해결책이 있긴 하다. 공공 구매다. 도서관 숫자가 해마다 증가하고, 예산도 큰폭으로 증가하고, 도서관은 매년 보유 장서 1만 권 이상 폐기하고, 다시 그만큼 사주고.... 이러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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