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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職)/책 만드는 일

헌책방, 중고 도서, 출판 시장

출판계 사람들은 흔히 중고 도서 시장이 책 판매를 저해하고 출판 경영을 악화시키만 한다고 생각한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기업형 온라인 중고 서점의 싼 가격과 편리성은 신간 판매를 위축시킬 수 있다.

그런데 책의 역사를 보면, 그와 반대 현상도 나타난다. 15세기 이래, 유럽에서는 중고 도서 시장이 장서 구축의 주요 동력이었다. 네덜란드 정부는 중고 도서 경매 시 카탈로그 제작을 의무화하는 등 중고 시장 활성화 정책을 펴기도 했다.

처음엔 서점들 반발이 컸다. 그러나 중고 도서 경매로 얼마나 많은 기회를 얻는지 깨닫고 난 후에야 이들은 중고 도서 경매를 환영했다. 중고 경매는 개인 장서가가 더 빨리, 더 크게 서재를 구축하는 걸 자극했다. (원래 서점 입장에선 대개 신간보다 구간이 더 많이 남는다. 많은 독립 서점이 중고 거래를 하는 이유다.)

도서 경매 카탈로그는 구매자들에게 책을 구할 새로운 기회를 충실히 제공했다. 더 중요한 건 구매자가 죽더라도 그 후손들이 책을 제값에 쉽게 팔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주었다. 책은 중고라도 가치를 꽤 잘 담보하는 상품이었다.

그 덕분에 장서가들은 읽고 싶은 책에 쉽게 투자할 수 있었다. 자신이 죽더라도 가족들이 돈을 쉽게 회수할 수 있음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책은 전문가의 삶에서 불가피한 도구가 됐고, 사려 깊은 사후 보장 보험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더욱이 나중에 가치가 올라가는 책[가령, 사인본, 호화 소장판, 희귀본 또는 내용이 너무 좋은 데 수요는 한정된 전문서 등)을 사 두면, 대박이 나기도 한다. 절판 중고 도서 가격을 보면, 대충 어떤 책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중고 경매 거래는 출판사에도 도움을 주었다. 출판업이란 본래 신용과 빚으로 돌아가기에(미리 대량 생산하고 나중에 파니까), 수요 예측에 실패하면 책을 만들 때 투자했던 돈을 회수하는 데 큰 곤란을 겪곤 한다. 확고히 자리 잡은 출판사조차 재고 문제로 골머리를 앓을 정도였다. 중고 도서 경매는 책에 투자한 돈을 현금화하기 어렵다는 출판계의 고질적 문제도 일정 정도 해결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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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답니다.

책은 필수품이 아니므로, 되팔 수 없을 때 구매에 무척 신중해진다. 반면, 좋은 가격에 되팔 수 있는 게 확실해지면, 여유 있을 때 일단 던진다.

웹소설 같은 건 가격이 무척 싸니까, 일단 돈 내고 나중에 가치를 따진다. 하지만 종이 책은 가격이 상대적으로 비싸므로, 사기 전에 온갖 고민을 다 한다. 편집자들처럼 내일 밥을 굶어도 오늘 책을 사는 비경제적 동물들은 표준 독자가 아닌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