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평론과 서평/절각획선(切角劃線)

이합체에 대하여

2024년 현대문학상 평론 부문 수상작은 양윤의의 「이합체(異合體)」(《현대문학》 2024년 5월호)이다. 이 작품은 현호정 단편소설 「청룡이 나르샤」(《문학동네》 2023년 겨울호)를 대상으로 삼아서 ‘이합체’라는 개념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양윤의는 올해 초 발표한 「마녀, 광녀 그리고 병원체로서의 여성」(《한국문학이론과 비평》 102집)에서 같은 개념을 다룬 적이 있다. 이 글은 도나 해러웨이, 애나 칭,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실비아 페데리치 등의 논의를 빌려서 이서수의 「엉킨 소매」(『젊은 근희의 행진』, 은행나무, 2023), 안보윤의 「어떤 진심」(『밤은 내가 가질게』, 문학동네, 2023), 구병모의 「있을 법한 모든 것」(『있을 법한 모든 것』, 문학동네, 2023)에 나타난 가부장제 공동체에서 배제된 여성의 모습을 분석한다.

두 글에서 양윤의는 이합체를 공동체(共同體, communitas)를 대신하는 대안적 개념으로 제시한다. 개념 창조가 인문학의 임무라는 점에서 무척 흥미로운 도전이다. 아마도 이는 수상 이유이기도 할 테다. 이 글은 두 글을 읽고 요약하면서 간략한 느낌을 적은 것이다.

이합체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타자들을 끌어안은 공동체, 즉 “타자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마녀」, 125쪽)이다. 처음에 저자는 이 개념의 라틴어 표기로 헤테로무니타스(heteromunitas)를 제안한다. ‘다른’을 뜻하는 접두어 헤테로(hetero-)와 ‘업무, 임무, 책무, 의무(또는 받은 선물에 보답할 의무)’를 가리키는 무누스(munus)를 결합한 말이다. 코무니타스가 공동 임무, 즉 “공동의 업무나 임무를 공유하는 이들의 관계”(「마녀」, 109쪽)를 뜻한다면, 헤테로무니타스는 그런 임무나 의무가 없는 이들의 집합체인 듯하다. 

그런데 이들을 하나로 묶는 합(合)의 의무 또는 논리가 없다면, 왜 굳이, 함께, 모여야 하는가? 사회 계약, 즉 공동의 규약 없는 합체는 어떻게 가능할까? 홉스, 로크, 루소, 칸트, 헤겔 등 수많은 정치철학자가 이 문제로 골머리를 썩였다. 이(異)를 합(合)으로 이끄는 논리는 무엇일까? 

양윤의가 이합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서구가 상상해낸 근대적 공동체가 타자의 배제를 바탕으로 해서만 성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타자들의 배제와 추방을 통해 성립하는 집합명사다. (중략) 공동체는 경제적 이해관계나 계급적 특성, 혹은 특정 이데올로기나 삶의 양식을 공유하는 이들의 집합이다. (중략) 타자는 이 공동체 바깥에서 배제와 추방의 대상으로 실존한다. 타자는 공동체가 ‘셀 수 없는 자’이다.”(「이합체」, 132~133쪽)

「마녀」에서 양윤의는 로베르토 에스포지토의 『임무니타스』(갈무리, 2022)를 디딤돌 삼아 공동체가 타자의 배제 위에 존재함을 증명한다. 에스포지토에 따르면, 공동체는 분열과 차별의 논리 위에서 성립한다. 그것은 무누스를 부정하는 타자를 예외로 두거나 배제하거나 추방함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다. “공동체는 권력 투쟁의 과정에서 인간을 제외한 동물을 배제하고, 백인을 제외한 다른 인종을 배제하며, 주류 계급이 아닌 노동자와 빈민을 배제하고, 남성이 아닌 여성을 배제해 왔다.”(「마녀」, 126쪽)

공동체는 자기 안에 반드시 배제해야 할 이러한 타자를 껴안고 있기에, 실은 공동체가 아니다. 공동 임무나 의무가 소멸하는, 또는 적용되지 않는 어떤 존재, 지점, 공백 등이 반드시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공동체는 (적어도 부분적으론) 이합체다, 아니 이합체일 수밖에 없다.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아르테, 2023)에서 도나 해러웨이는 근대 서구의 생명 정치 공동체가 면역 체계를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근대과학은 흔히 면역을 자기와 타자, 외부와 내부를 구별하고, ‘나와 다른 것’에 병리적인 것을 덧씌워서 이를 극복하고 무찌르기 위한 시스템으로 생각한다. 이럴 때 면역은 자기와 타자 사이의 경계를 설정해서 공동 임무를 수행하지 않는 자를 가려내고, 그들이 나와 섞이지 않도록 경계를 구성하고 유지하고 통제하는 데 필요한 행동을 규정하는 계획서로 작용한다. 하지만 이는 면역에 대한 오해에 불과하다.

해러웨이에 따르면, 면역은 타자를 규정하고 배제하는 시스템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자아와 타자를 구분하는 경계를 허물고 ‘얽힘’의 관계 형성을 가능하게 하는 기제”(『트러블과 함께하기』, 마농지, 2021)이다. 타자와 섞여서 함께 살아도, 즉 병에 걸려도 쉽게 죽지 않을 수 있기에 생명은 기꺼이 다른 유전체를 받아들여 진화를 거듭하면서 다양성을 이룩할 수 있다.

린 마굴리스가 『공생체 행성』에서 이야기했듯, 생물 진화를 추동한 것은 이러한 타자 연합이다. 진핵생물, 미토콘드리아, 엽록체 등은 그 증거이다. 생명의 역사는 타자를 받아들여 결합, 합병, 공생을 선택함으로써 새로운 생명체를 이룩해야 환경 변화에 적응해서 생존을 이어가기 쉬움을 보여준다. 『트러블과 함께하기』에서 해러웨이는 ‘우리’가 그 기원에서 이질적인 ‘타자들의 연합’이라고 말하면서 공생적 집합체의 가능성을 강조한다. 애나 칭 역시 『세계 속의 버섯』에서 “타자와의 공생이 예외가 아니라 규칙”(현실문화, 2023)이라고 말한다. 타자들의 집합으로서 ‘이합체’를 말할 때, 양윤의는 이러한 존재론적/생물학적 공생 또는 공산 개념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이합체」에서 양윤의는 타자가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일자를 적용”할 수 없는 집합체가 아니라면서, “언제나 개체”로서, “개별자로서 다루어지는” “‘타자들의 집합’을 사유할 수 있을까?”라고 묻한다. “타자들을 묶는 공통의 원리나 타자들을 가로지르는 단일한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 “타자-공생자들의 집합”(「이합체」, 133쪽)을 상상해 보자는 뜻이다. 그러면서 「마녀」에서 정치철학 개념을 빌려 heteromunitas로 표기했던 이합체를 생물학 개념에 가까운 헤테로제니어티(heterogeneity)로 바꾼다. “heterogeneity는 이질성, 이종성, 이종 혼교성 같은 말로 번역되는데, 여러 학문에서 균질적이지 않은 특성(색깔, 모양, 크기, 질감, 언어, 몸, 질병, 유전자, 지질, 온도, 건축물, 기후 등)들의 모음이란 뜻으로 쓰인다.” 임무가 내포하는 사회 계약적 차원에서 종(gene)이 의미하는 생물학적, 존재론적 차원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존재론적 차원에 자리 잡는 순간, 사회적 차원에서의 이합체는 오히려 모호해지는 듯하다. 임무니타스를 배제하는/할 수밖에 없는 공동체를 비판하던 에스포지토는 흥미롭게도 “우리 신체가 외부에 ‘열려 있’음, 즉 취약하다는 조건이 감염과 면역의 연쇄망 속에서 긍정성의 영역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긍정의 생명 정치”, 즉 “함께-있음에 근거한 공동체를 제안”(「마녀」, 110쪽)한다. 

이와 유사하게 양윤의도 “이합체 내에서 타자들 각자는 이질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도 이들에게 어떤 결합 작용[合]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중략) 대립하는 것들의 화해에도, 위계적인 계열화에도, 상보적인 상호성에도 속하지 않으면서도, 여기에는 다름이 중첩되어 이루어내는 모종의 합산이 있다.”(「이합체」, 134쪽)라고 말한다. ‘어떤’이나 ‘모종의’ 같은 말이 보여 주듯, 합산을 이룩하는 힘은 구체적 논리가 아니라 “~할 것”이라는 가정법이다. “하나의 몸체를 한 이상, 그 몸체가 구현하는 어떤 표현형을 이 타자들이 구현할 것이기 때문이다.”(「이합체」, 134쪽)

에스포지토가 말하는 긍정의 생명 정치는 일자의 논리에 따라 ‘통합, 융합, 화합’을 강조하는 코무니타스가 아니라, “주체를 가장 극단적인 위험에 노출함으로써 이루는 결속이며, ‘이탈, 우회, 확산’의 방식을 취하는 공동체”(「마녀」, 123쪽)이다. 양윤의 역시 “배제와 추방의 논리가” 아니라 “융합과 포함과 혼입(混入)의 논리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상상할 수 있을 것”(「마녀」, 125쪽)이라면서 문학은 “타자들을 무의미로 만들지 않”으면서, 즉 “다른 젠더를 포함하고, 반려종을 비롯한 다른 종과 함께 먹고 마시고 얽히며 살아가는 공동체”를 상상하고 창안하고 기록하는 일에 참여한다고 말한다. 

이합체는 결국 무규약의 이질적 공생체, 사회 계약도 공동 규칙도 없이 주체를 낯선 위험에 노출함으로써 생겨나는 어떤 비정형 공동체에 가깝다. 그런데, 어찌 보면, 그건 ‘이미’ 존재한다. 우주의, 자연의, 사회의 존재론적 상태이기 때문이다. 문제가 있다면, 이질성을 견디는 강력한 면역체계의 존재일 테다. 무엇이 그런 면역 체계를 우리 안에서 진화시키는가. 우리는 이질적 존재와 공생할 때까지 치러야 할 열병, 현기증, 고통, 공포, 비틀림, 혼란, 죽음 등을 견딜 힘을 어디에서 얻을 수 있는가.

생물학적, 존재론적 면역 체계도 때로는 병원균에 패배한다. 우리가 모두 다르다는 사실은 이미 홉스, 로크, 스피노자, 루소, 칸트, 헤겔 등도 잘 알았다. 어려운 것은 이합(異合)의 공생체를 사회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면역 체계, 즉 괜찮은 사회계약을 구축하는 일이었다. 이합체(異合體)에서 실제로 증명하기 힘든 것은 이(異)의 존재론보다는 합(合)의 윤리학일 수 있다. 선언적 의미를 넘어서 현실에서 이질적 타자와 공생하는 일은 무척 힘들다. 타자를 배제하지 않으면서 공산과 공생을 이룩하는 유토피아 기획은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동서양의 모든 정치철학이 이 질문 앞에서 서성대 왔다.